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그미 Jun 01. 2024

아들과 처음 떠난 여행 (1)

늦었지만

부부에게 아기는 관계를 탄탄하게 해 주고 결속을 강화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내 경우에 첫 아이의 출산은 굉장한 갈등과 해체적 사고를 가져다준 사건이었다.


첫째를 낳은 직후, 나는 엄청난 갈등에 빠지고, 그 갈등에 사로잡힌 채 오랜 시간을 보냈다. 아이를 낳고 3개월의 출산휴가를 마친 뒤 바로 일을 하기로 결정하는 바람에, 아이를 시어머니께 맡겨야 했다. 여기까지는 임신 중에 정해 둔 것들이니 나도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안 괜찮았다.' 어머님은 벌써부터 '육아모드'로 아기를 기다리고 계셨고, 나는 출산휴가 기간에는 오롯이 내가 아이를 돌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리원을 퇴소하고 시댁에 아이를 데려간 날, 어머님은 아이를 거의 손에서 놓지 않다시피 하셨는데, 젖을 먹여야 할 때만 나에게 아이를 주셨다. 그마저도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마저 지켜보려 하셨고, 어머님 앞에서 윗도리를 훌렁 벗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다가 갑작스럽게 황당함과 현타와 혼란함을 느꼈던 게 기억난다. 젖도 별로 안 나와서 결국 분유를 타서 먹일 것이었는데, 괜히 수치심만 들게 무슨 짓이었을까. 아마 분유를 먹이면 아무나 젖병으로 아기를 먹일 수 있으니, 내가 아기와 있고 싶어서 안 나오는 젖이라도 굳이 우선 물려보고 싶었던 것 같다.

같은 날 나는, 다시 말하지만 조리원을 퇴소한 날이었는데, 곧 이사해야 할 집 때문에 대출서류를 내러 은행에 가야 했다. 11월이 끝나가는 겨울, 코로나 방역이 한창이던 시국에 (조리원에는 남편도 출입할 수 없었다) 신생아를 안고 은행을 갈 수 없어서 어머님께 아기를 맡기고 은행으로 향했다. 무릎과 발목은 시리고, 그럼에도 아기를 어머님께 두고 나오기가 싫었다. 이 대출이 아기를 어머님께 맡기기 쉽도록, 어머님 댁 근처에 살기 위해 무리해서 실행하는 대출이란 점 때문에, 그날 은행 가던 길은 더욱 우울했다.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중 무엇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와 있다. 그러니 그저 은행으로 가던 길 가던 수밖에.

뭐, 이런 것도 산후우울이라고 해야 하나? 글쎄, '출산 후' 어마어마하게 '우울'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호르몬이 폭발하고 그런 것은 잘 모르겠고, 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엄청 우울했다. 내 아이를 내가 독점하고 키울 수 없어서 우울했다. 벌써부터 내 아이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안으려고 들어서 우울했다. 왜 내 아이는 장손이지? 왜 저출산 시대인 거지? 왜 집안에 아기가 귀해서 내 아기가 이토록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지? 내가 안을 틈도 없게?

아기를 돌보는 남편과 어머님이 행복해 보인다. 나는 아닌데. 저 따뜻한 미소와 웃음과 포옹이 있는 세상에 내 아기가 있고, 나는 그 따뜻한 세상에서 혼자 우울해하고 있다. 기분이 바닥을 파고 끝없이 나빠진다.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아기를 내가 돌보고 싶어. 그러면 새로 이사 갈 집의 이자는 어쩌지? 육아휴직만으로 그걸 감당할 돈이 되나? 아니, 안 될 것 같은데. 그러면 일을 해야겠네. 아기는 어머님께 맡겨야 하고. 아니, 나는 애 키울 돈도 없이 뭐 했지? 왜 이렇게 일을 안 하고 살았지? 돈, 돈. 내가 우울한 이유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다 결국 돈이 되는 건가? 그 지겨운 돈 이야기. 아, X발, 병신 같은 나. 형편없이 살아온 나. 아이를 내 몸으로 돌볼 시간도, 돈도 없이, 이 지경까지 와서, 행복한 어머님과 남편과 아기를 보면서 잘못 끼워진 조각처럼 어색한 자리에 서 있는 나. 정말 싫다.


그런 감정으로 육아를 시작했다. 아기를 낳고 싶었고, 기뻤지만, 맑은 기쁨은 아니었다. 힘든 것은 싫다. 그런데 힘들었다. 젖병 삶기가 힘들고, 신생아의 울음에 맞춰주기가 어렵다. 조리원에서 2주, 친정에서 2주를 지내고 났더니 산후돌보미 서비스를 사용할 기간이 만료되었다. 다른 도움을 받을 길이 없고 나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기는 변함없이 좋지만, 뭘 어째야 할지 갈피가 잘 안 잡힌다.


출산휴가 3개월은 짧았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출근해야 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 어머님은 아침 7시에 아기를 데리러 포대기를 들고 우리 집에 오셨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아침잠을 더 길게 잤다. 무슨 심술이냐고? 내 심술이다. 심보가 이렇게 생겨먹었는데 어떡하나. 어떤 엄마들은 직업인으로서의 제모습을 잊지 못해 아기를 돌보다 우울해진다던데, 나는 내 직업에 그 정도로 사랑과 열정을 쏟아붓질 않아서 직업이, 직장이 그다지 아깝지 않다. 쥐어 봐야 푼돈인데도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싫고 아이를 어머님께서 데려가시는 상황이 싫었다.

지금 버티고 일해야 십대가 된 아이가 나이키 신발을 사달라고 할 때 망설이지 않고 사줄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출근했다. 그래도 가끔 욕을 뱉었다. 아, 젠장.


어머님은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셨다. 우리 첫째는 어머님께서 키웠다고 말해야 한다. 아니, 어머님은 우리 가족 전부를 키우셨다. 새벽 다섯 시면 (종종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신다. 기 분유 전용 포트를 두시고, 백일이 지나도 젖병을 매일 삶으시고, 이유식을 매 끼마다 새로 준비하셨다.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업고, 재우기에 정성 안 들이신 부분이 없다.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신 경험을 살려 장난감과 교구를 활용해 놀아 주시고, 책을 소리 내어 읽어 주셨다. 비가 오면 업고 비 구경을 시켜 주시고, 날이 놓으면 날이 좋은 대로 나무, 새, 고양이를 구경시켜 주시고. 그렇게 낮을 보내다 남편이 퇴근하면 아기와 놀게 하신 후 저녁을 준비하셨다. 아버님, 어머님, 나, 남편, 아기가 먹을 저녁을 전부 다 말이다. 저녁 여섯 시 내지는 일곱 시쯤이 되어 내가 퇴근하면, 저녁을 함께 먹고, 아홉 시가 되기 전에 우리 세 식구는 집으로 돌아와 잠들 준비를 했다. 어머님의 하루일과는 어마어마한 성실함과 체력, 사랑으로 채워져 있었다. 수고를 짐작만 해도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감사하고, 죄송했다.


내가 아이를 길러도 어머님의 정성만큼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님에 비해 게으르고 세심하지 않다는 사실이 나를 설득하기도 했다. 어머님만큼 다정하고 상냥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님만큼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돌보고 조심할 수 없을 것이다. 제로 어머님의 경계는 내가 가 닿을 것이 아니었다. 아이와 어머님 간의 유대는 깊어져 갔다. 나는 조금씩 아이와 멀어졌다.

퇴근 후 나를 맞이하던 아이의 모습이 언제부터 그렇게 변했더라? 양 발을 바둥바둥 구르며 나를 바라보고 웃던 아이는 어느 날부터인가 현관에 달려왔다가 나를 보고 달아나는 놀이를 즐기는 듯하더니, 어느새 내가 퇴근하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놀던 장난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전 02화 나의 악취미-남편의 이해를 연료로 삼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