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에서 문명으로

가자.

by 심그미

매일 아이들과 씨름하는 아침에 대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나는 내가 겪는 일들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이해받기를 늘 갈구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아침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는 건 별로 좋은 대화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고달픔이 매번 따라붙는 아침에 대해 듣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시기별로 육아의 화두는 계속 바뀌고, 부모는 그 화두에 몹시 몰두하기 때문에, 자기 아이 또래가 아니라면 남의 아이 이야기를 궁금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이가 없다면 육아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그다지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육아하는 아침 이야기는 굉장히 더러운 부분이 많다.

아이들은 어린 생물답게 보송보송하고 아장아장 서툴게 다니고 해맑고 귀엽다. 그러나 그 귀여운 몸뚱이로 저지르는 일들은 꽤나 힘차다.


나는 그걸 '야만에서 문명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곤 한다. 식사를 하다 말고 아이들의 용변을 치우는 일도 많고, 집을 나서려고 외투를 입다가 갑자기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 날도 많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서두르다 욕실 바닥에 덩어리 똥이 구르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시간의 흐름이라는 우주의 절대법칙이 아이들의 등원과 나의 출근을 지각의 길로 자꾸 끌고 가려고 할 때마다, 나라는 개인의 저항이 얼마나 눈물겨운지를, 하늘은 아마 지켜보았을 것이다.




아침마다 내가 꾸몄고 내가 꾸리는 집에서 내 아이들의 야생성을 견디다 등원시킨 후 사무실에 출근하면, 여기는 그야말로 현대문물이 꽃피는 세계인 것만 같다. 비록 파티션과 카펫의 색은 우중충하고, 콘크리트벽은 추울 때 추운 공기, 더울 때 더운 공기를 뿜더라도. 교육과정을 마치고 적당한 예의와 사회성으로 무장한 성인들만이 우글거리는 곳. 집에서의 생활과 사무실의 사건이 대비될수록 묘미도 크다. 사무실은 집과 달리 나를 외부로 확장해야 하는 곳이다. 사무실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정보와 지식이 오가고, 규율과 위계가 지배하고, 감정의 희로애락이 개인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공동체 차원에서 공유된다. 나는 다른 직원이 입은 잘 재단된 재킷에서, 점심시간을 함께하는 동기가 식사 후 꺼낸 거울과 립스틱에서, 전화로 논쟁을 주고받는 사무실의 소음에서, 여기는 내가 아침에 떠나온 우리 집과 참 다른 세계라는 생각을 여러 번 곱씹곤 한다. 이쪽이 저쪽의 피안인지, 저쪽이 이쪽의 피안인지 모르겠다.

피안을 정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어리석은 것 같기도 하다. 둘 다 나의 현실인 것을 왜 매일 생경하게 여기는 것인지.




내 아이들은 각각 만 39개월, 18개월을 지나고 있다.

-가장 예쁠 때지.

사춘기 자녀를 두고 고민하는 선배 공무원이 말씀하신다. 사무실에서 그런 대화를 하면 불쑥 아이들이 보고 싶다.

말 그대로 우리 아이들은 정말이지, 요즘 한창 귀엽다.

말은 썩 안 듣는다. 답답할 때도 많다. 첫째 솔라는 발달이 조금 늦다. 나이에 비해 말이 서툴다. 특히 조음기관이 미숙해서 아직 발음할 수 있는 자음이 몇 개 안 된다. 모음 중에도 'ㅗ,ㅜ,ㅛ,ㅠ'같은 입술모음 소리는 못 낸다. 그래서 아이는 '음'으로 대신하는 음절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말은 점점 늘어, '음, 이, 아' 등으로 문장을 재잘거리곤 한다.

나는 아이보다 더 여러 가지 모음과 자음을 알아서, 우리 아이의 긴 문장을 못 알아듣는 날이 많다.

이것만큼은 답답해서, 나는 솔라의 근육이 빨리 발달해 여러 발음을 해낼 수 있기를 조바심을 내며 기다린다.

우리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같이 노는 친구가 좋다, 싫다고 매일 변덕을 부린다는데. 어떤 아이는 집에서 파란 물건은 죄다 자기 차지라고, 소파에 두는 파란 쿠션은 무조건 제 것이라며, 아빠와 엄마가 쓸 쿠션 색깔까지 정해주는 독재자(?)라는데. '물 주세요'라는 말보다 '백, 이백, 삼백' 숫자 세는 소리를 더 자주 내는 우리 아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걸까?


둘째 루나는, 발달이 빠르다. 돌이 다 되어서야 겨우 아랫니 두 개를 보이던 제 오빠에 비해, 루나는 이도 이유식을 시작할 무렵에 불쑥 나왔다. 이유식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쌀밥을 탐내기 시작하더니, 먹는 데에는 재능이 있는지 벌써 짜장라면을 포크로 떠서 숟가락에 대고 면발을 돌려 입에 넣을 줄을 안다. 아장아장 포동포동 방실방실한 아기가 수저를 그렇게 다루는 모습을 보면, 처음에는 놀랍고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다음에는 기특하고 신기하고 아까워서 웃는다. 그럴 땐 아이가 크는 게 좋으면서 아깝다.


루나가 요즘 식탁 위에서 자꾸 물난리를 만든다. 마실 물을 주었는데, 다른 식구의 컵을 하나 더 끌어다 놓고 이 컵에서 저 컵으로 물을 옮겨 붓는다. 재미있나 보다. 솜씨가 서툴다. 물이 자꾸 식탁으로 쏟아진다. 바닥에도 흥건하게 물이 고이곤 한다. 그 물을 치우면서 자주 후회했다. 애들은 다 이게 재미있는 시기를 거치나 보다. 다 때가 있는가 보다. 이런 줄을 알았다면, 솔라가 컵 두 개로 물을 쏟아대던 그 시절에, 좀 덜 화낼 것을 그랬다.

지금 알았던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솔라를 더 넉넉한 품 안에서 키워줬을 텐데.

첫째를 키울 때 몰랐던 것과 알았던 것을 둘째를 키우며 복기한다.


아이들은 같이 큰다. 서로를 보며 배운다.

솔라가 자꾸 소리를 크게 지른다. 꺅! 꺅! 조그마한 녀석이 성량은 어른 못지않다. 그게 제 딴엔 장난인가 보다. 시끄럽다고 주의를 주다가, 멈추지 않길래 벽에 등을 붙여 세우고 훈육했다.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다그치고, 어렵게 '네'라는 대답을 들은 후에, 훈육을 마쳤다. 솔라는 벽에서 등을 떼고 거실에서 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걸 지켜본 루나가, 혼자 '꺅!' 하고 짧게 소리를 지르더니, 혼자 오빠 혼나던 그 자리에 가서 같은 벽에 등을 붙이고 서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곧 '네!'하고 혼자 내뱉고, 거실로 돌아와 노는 것이다.

그걸 지켜본 나는 또 어처구니가 없어 웃고 말았다.




솔라에게 빨리 남들만큼 커 달라고 텔레파시를 보낼 때가 있긴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솔라를 여유롭게 기다려주는 것이 있다. 바로 용변 가리기. 돌만 지나면 떼는 아이도 있다며 어머님께서는 아이를 여름마다 기저귀 없이 벗겨놓으셨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솔라는 그리 빨리 해낼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기저귀를 천천히 떼도 괜찮다고, 기다릴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리고 드디어 올봄, 솔라가 소변을 조금씩 가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기저귀를 벗은 채 놀다가 본인이 알아서 화장실로 간다. 바지 벗기를 견디지 못하기도 하고, 혼자 벗고 무사히 해내기도 한다. 변기에 도달할 때도 있고, 화장실 바닥에서 볼일을 마치고 말 때도 있다. 잘할 때마다 당연히 한바탕 칭찬을 해 준다. 아이가 한 번, 또 한 번 성공할 때마다 나도 진심으로 기쁘기 때문에 칭찬이 절로 나온다.

그러면서 한 뼘 더 자란 걸까, 그리고 마음의 문을 한 뼘 연 걸까. 늘 아빠를 먼저 찾던 솔라가 요즘은 아빠를 두고 내게 안기러 올 때가 있다. 늘 아빠 품에서 잠드는 아이가 오늘은 내 팔을 벤 채 낮잠에 들었다. 오른팔에 솔라를 누이고, 왼팔에 루나를 뉘어 재운 뒤, 천장을 바라보며 두 아이의 고른 숨소리를 듣는 순간. 그 평온함과 뿌듯함, 그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어느 삶에나 있는 그 여상한 감정이 바로 내 것일 때. 정말 별일 아닌 것 같음에도, 실감하면 얼마나 감동적인지. 나는 오늘 중 가장 현실적으로 살아있음을 느낀 것 같다.


아, 내가 사무실의 쾌적함이 좋다고 했던가? 아이들 뒤치다꺼리와 지난한 살림의 반복을 피할 수 있어서? 맞는 말이지만 아이들과 조용히 눈을 마주치고 내 팔에 눈을 비비다 잠드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사무실이고 자시고 다른 것은 정말이지 생각하고 싶지 않아진다. 이 순간의 아늑함을 다른 것에 비길 수 있을까.

그리고 아이들이 야생을 벗고, 야만에서 문명의 세계로, 갈수록 자라고 배우면 나와 이토록 아늑한 시간을 보내기는 어려워질 테지. 앞으로 수십 년을 비슷비슷하게 반복될 직장생활에 비해 아이들이 자라는 이 시간은 얼마나 짧고 흥미롭고 아깝고 아득한가.


평일이면 아이들이 빨리 크면 좋겠다고, 학교 입학만을 기다린다고 한숨을 푹푹 쉬다가, 주말에 아이들을 껴안고 뒹굴다 보면 시간이 너무 아깝다. 삶에 때가 있다는 게 정말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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