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참 비서님에게 배우다

디테일은 눈을 떠야 볼 수 있다

by 심그미

연말 국장급 인사발령이 났다.

며칠 후면 우리 국장님은 우리 국장님이 아니게 된다. '복지국' 그 글자를 보고는 국장님이 씨익(이라고 쓰고 '젠장'이라고 읽어야 하겠지) 웃고 말 뿐이었다.

"하아, 여기 업무 이제 알 것 같은데, 가라고 하네."


수십 년 공무원 생활을 했다는 건 짐을 풀고 싸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잦은 인사발령으로 두어 달만에 담당업무가 바뀔 때도 있다. 국장님 짬밥에 짐 풀고 싸는 것이 얼마나 쉬울까. 특히 이분은 '짐을 풀지 않으시더라'라고 불릴 정도로 잔짐을 부려놓지 않으시는 분이다. 파쇄할 자료를 내게 한아름 주시고, 쇼핑백 두어 개에 개인 물건을 착착 넣어두셨다. 바로 다음 주면 새로운 사무실로 가셔야 하지만, 아직은 우리 국장님인데.

벌써 짐을 싸시느냐고 말을 건네자 국장님은 대강 대답하시더니, 국장실을 휘 둘러보고 말씀하셨다.

"여기는 뭐가 없어. 거긴 다 있을 거야. 그러니 여기 것은 최대한 안 가져가. 이런 거 새로 사. 다 바꿔놔야 해. 새로운 국장 올 때에는."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책상, 회의탁자, 의자 여러 개. 캐비닛, 옷장, 소파, 낮은 탁자 등. 일에 필요한 가구는 다 있는 것 같은데, 우리 국은 신설된 지 몇 달 안 되어 가구도 거의 새것일 텐데, 왜 자꾸만 뭐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걸까?


새로운 국장님께 잘 보여서 비서 업무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아침마다 육아시간으로 30분 늦게 오는 비서이기에 다른 부분이라도 모자람 없이 해드리고 싶은 미안한 마음도 있고. 우리 국장실에 도대체 모자란 것은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해 봤다. 혼자 생각해서는 모르겠어서 복지국의 언 비서님께 전화했다. 나는 이분이 낯설지 않다. 육아휴직 전 내가 바로 복지국 소속 직원이었다. 그때도 이분은 복지국장의 비서셨다. 사실 나는 이분과 더 오래 일해왔다. 내가 임용되던 당시, 기획조정실의 실장 비서가 바로 이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공무원 생활 내내 언 비서님 말고는 달리 아는 비서님도 없는 셈이다. 마침 우리 국장님이 복지국으로 가시게 된 바람에 언 비서님께 내가 국장님에 관한 참고사항 등을 인계해 드리는 입장이 되었다. 그 일로 몇 마디 주고받은 김에 도움까지 요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국장님께서 저희 국장실에 대해 이러하다고 말씀하시는데요, 대체 뭘 더 준비해 놓으라는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찻잔은 몇 개나 있느냐는 물음에 답했더니 헉하고 놀라신다. "너무 적어요. 찻잔이 열 세트는 있어야 해요."

짧은 대화 끝에 청사 내 문구점에 필요한 비품을 사러 가실 때 나를 불러주마 하셨다.


비서님의 문구점 마실은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그날 당장 가실 줄 알았더니, 꽤나 바쁘셨는지 이틀 정도는 지난 후에 연락을 주셨다. 부랴부랴 따라나섰다. 문구점에 도착해 보니 이미 바구니에 뭘 한가득 담고 계셨다. 국장님이 즐겨 쓰는 펜을 물어보시더니 종류별로, 색깔별로 두 다스씩이나 담으셨다. 아니, 저런 큰손이 있나! 우리 부서는 사무운영비가 부족한 바람에 국장님께서 날더러 볼펜을 검정 두 자루, 파랑 한 자루 세어서 사 오라고 시키곤 하셨는데?

국장님이 아침마다 커피를 드신다는 말에 드리퍼와 그라인더를 담으시고, 즐겨 쓰시는 파일 홀더를 물으시고, 마우스패드, 키보드, 펜꽂이... A4종이를 액자처럼 끼우는 아크릴 홀더가 종형, 횡형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이 모든 걸 국장님이 바뀔 때마다 새로 사나요? 비서님의 시원시원한 구매력에 놀란 내가 여쭤봤다. "마침 낡은 것들이 많아요. 국장님이 오래 계시다 바뀌어서." 그러고 보니 전임 복지국장께서는 무려 2년 동안 계셨다. 공무원은 한 부서에 2년 이상 있는 경우가 드물다.

내게도 살 물건을 권하셨다. 새 국장님이 쓰실 펜꽂이, 컵, 때로는 국장실 공기를 관리하기 위해 페브리즈가 필요하고, 만일 급한 출장에 찾으실 수 있어 휴대용 양치세트를 구비해 두면 좋다는 것. 대강과 디테일의 구별도 없이 뒤죽박죽 배우면서, 언 비서님을 따라 몇 가지 물건을 샀다. 문구점을 나설 때 간단한 것들만 담은 내 비닐봉지는 가볍게 달랑달랑거리는데, 언 비서님은 양손에 묵직한 짐을 가득 들고 계셨다. 비서님이 꾸리고 있는 복지국장실과 비서실의 비품도 구경했다. 그곳에는 내가 모르던 노련함과 배려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비품실에는 티포트가 두 개나 있었고, 각종 차와 간식이 종류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햇살 잘 드는 창가에는 레이스 매트 위에 쟁반들이 크기별로 가지런히 놓여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국장실 안은 소파에 방석이, 테이블에는 테이블보가. 아니 이런 꾸밈 외에도 국장님의 일정표가 방 안에서 국장님의 동선에 맞춰 책상과 전화기에 보기 좋은 위치에 놓여 있었고, 주간일정, 월간일정도 아크릴 케이스에 꽂혀 책상에 자리 잡고 있었다. 비품이 넉넉하다는 점만이 차이가 아니었다. 분명 언 비서님과 나 사이에는 누적된 시간에 따른 격차가 클 테지. 하지만 내가 비서 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던 건 아닐까.


비서의 역할이란 그저 돌아다니는 일정 리마인더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걸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장님께 일정을 알려드리는 방법이 단순히 문을 똑똑 두드리고 '국장님,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혹은 '보고 받으셔도 괜찮으세요?'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사업담당자일 때는 자꾸 주간행사나 일일행사 같은 별 궁금하지도 않은 윗분들 일정이 메신저로 공유되는 게 그저 귀찮았는데, 비서가 되어 국장님 일정을 관리하니 알겠다. 간부님의 일정은 우리 조직 내에서 업무를 위한 중요한 정보라는 걸.

때때로 정말 필요한 것만 갖춘다는 것이 반드시 합리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생각하게 되었다. 사무용 가구와 가전만 갖춰놓은 우리 국장실로 돌아와 보니, 정말이지 삭막하고 분위기 없다. 심지어는 사무용 집기나 문구류 마저도, 용이한 업무수행을 돕기에는 다소 부족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외부 손님들이 국장실에 다녀갈 때, 우리 국장실에서는 삭막하고 궁색함을 느꼈을까 싶기도 하다. 공무는 그게 중요하지 않고 그게 전부도 아니기는 하지만, 어떤 직장이든지 기관이 외부에 주는 '인상'이라는 건, 의전처럼 중요한 것일 텐데.


그 후 나는 문구점에 종종 들렀다. 서무님이 녹색기업 구매실적을 채우기 위해 문구를 다량 주문할 테니 필요한 것을 이야기하라고 했을 때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장실의 사무용품을 장바구니에 잔뜩 담았다. 모든 걸 처음부터 끝까지 살 수는 없었다. 여전히 우리 국장실의 찻잔은 짝이 맞지 않는 7벌이 전부다. 하지만 가죽 마우스패드는 국장실의 품위를 조금 더해준 것 같고, 일일 일정표는 이제 회의탁자와 업무책상 두 곳에 배치해 둔다. 당장 곳곳에 레이스를 깔아 장식하거나 그림을 걸 수는 없지만, 나는 전보다 더 국장실을 쾌적하게 관리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도 다이소에 가서 사무용 비품과 정리도구를 좀 사 왔다. 매일 자료를 정리하고 만료된 자료를 바로 버리시는 국장님의 패턴에 맞춰 파쇄용 바구니를 마련해 드렸더니, 퇴근할 무렵이면 바구니에 파쇄할 서류를 모아 두신다. 국장님 퇴근하신 후 서류를 파쇄하고, 휴지통을 비우고, 때때로 먼지를 닦고, 내일의 일정을 거치해 놓고 나도 퇴근한다. 국장님을 어떻게 배려해 드려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나의 루틴도 조금씩 변하고, 이리저리 조정이 되어가고 있다.


국장님을 기다리며 새 잉크펜을 색깔별로, 샤프와 연필을 종류별로 하나씩, 그렇게 펜꽂이를 채우고 있는데, 주무팀의 차관(6급 주무관 중 팀장 부재 시 업무를 대리하는 차석 주무관을 줄여서 차관님이라고 부른다)님이 나를 아주 같잖게 보며 웃는다.

"왜 그리 같잖게 웃으시나요?"

"같잖으니 그러죠."

이 분의 농담은 늘 짓궂다.

"있잖아요, 만에 하나 해서 물어보는데요, 주무팀으로 이동해서 단위업무를 맡아보고 싶다는 생각 해 봤어요?"

"음, 당분간은 없습니다. 저 이제야 비서 업무에 새로운 눈을 떠서요. 한동안 국꾸 할 거예요. 국, 꾸."

"국, 꾸?"

"국장실 꾸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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