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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인생 소피아는 쇼핑을 좋아하고

by 심그미

어찌 보면 가성비 좋은 인생이었달까. 딱 10대까지는 말이다.

책과 떡볶이 외에는 딱히 돈 들여 뭔가를 사지 않는 생활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다 그렇지. 고등학생이 되고 돈을 좀 쓰고 싶어 져서 사게 된 것이 예쁜 펜, 다이어리, 필통 같은 것들. 시험 끝나고 맞이하는 첫 주말에 기차를 타고 도시에 가서 조조영화를 학생할인받아 반값도 안 되는 가격에 보고, 그 영화가 끝나면 영화관이 붙어 있는 백화점에서 제일 싼 옷을 샀다. 그런 날은 진짜 설레는 날이었다. 가끔 노래방은 가지만, 오락실도 잘 갈 줄 모르고, 도서관에서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며 주말을 보내는 평온한 학생의 생활.

성적도 그만하면 가성비 있는 점수였다. 과외를 전혀 안하진 않았지만 남들보다는 적게 했고, 평균보다는 높은 점수를 받았으니, 그 정도면 가성비 괜찮지, 뭐.

대학에 입학해 도시에서 생활하게 된 나는 현대의 문물에 놀란 시골쥐였다. 아니, 어쩌다 뜀뛰기를 너무 잘해서 우물 밖에 나와 땅 위를 처음 본, 황망하기 그지없는 개구리에 가까웠다. 땅 위로 나와도 살 수 있기는 하지만, 내 우물과는 작별해야 하니까 개구리에게는 하나의 세계가 무너진 거였다. 우물이 무너져서 세상을 얻었는데, 그 세상은 내 세상이 무너진 세상이라서 개구리는 괴로웠다.

내가 살던 시골에는 없던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가게. 늘 TV광고로 예쁜 아이스크림 영상을 보면서도 우리 고장에는 없기 때문에 그저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었다. 시험이 끝난 주말, 영화를 보고 나서 시내를 구경하면 그때에나 한 번 먹던 아이스크림. 학교 앞 매점에서 사 먹는 스크류바에 비하면 몇 배나 비싼 것. 접근할 기회도 적고 가격마저 특별한 것. 무슨 맛이 가장 좋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그 모두를 맛보지 못해 순위를 매길 수도 없이. 선택지가 넓어 당황스럽던 것. 그런 것이 대학 정문을 나서면 걸어서 10분이면 사 먹을 수 있었다. 심지어 한 동네 건너 한 동네, 상점이 조금 모였다 하면 심심찮게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비싼 아이스크림 가게가, 그 정도로 망하지 않고 먹고살만하게 운영되는 곳. 도시의 소비력은 굉장하다.


빽빽한 도시. 시공간의 밀도가 감당할 수 없이 높은 곳. 시골을 벗어나 만나게 된 드넓은 세상은 다채롭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아주 다층적인 상업이 판치는 곳이었다. 나도 같은 나라에서 자유시장경제 사회에서 컸지만 도시의 상업은 범위와 층위가 달랐다. 나는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건 상업자본이었다. 나는 세련된 상업의 세계가 좋아졌다. 그걸 쉽게 보고 접할 수 있는 도시는 재미있는 곳이었다.

심심하고 시간을 때우고 싶어지면 도서관에 가던 습관이 사라졌다. 우울한 기분에 잠길 때면 백화점에 가서 예쁘게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했다. 공원의 산책길을 따라 걷듯 맨 아래부터 맨 위층까지를 한 바퀴씩 돌며 걷다 보면 상업자본의 화려함과 조명에 내가 절여진 듯 피곤해졌다. 윈도쇼핑의 쾌감과 피로를 껴안고 자취방에서 잠이 들었다. 촌뜨기였던 내가 반짝이는 가방과 목걸이, 구두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밤, 어쩌면 안목이 높아졌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적은 돈으로 뭔가를 사 오는 날은 구매 자체가 추억이 되었다.

그때부터 적극적인 소비자가 되고 싶다는 게 새로운 꿈이 되었다.

꿈이 많아졌다. 내 집 마련의 꿈. 명품가방의 꿈. 성공한 삶이란 비싼 것을 많이 살 수 있는 삶이라는 도식도 내면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꿈은 꾸라고 있을 뿐, 소피아는 도시 생활의 부작용으로 패배주의와 우울증에 빠져 마음고생을 한 데다, 정신을 차려 보니 스펙 경쟁에서 밀려나 있었고 취업시장은 인턴이나 열정페이가 판치고 있었다. 소극적인 구직자가 된 소피아는 이런저런 일로 시간을 흘려보내다 결국 박봉인 직업을 전전하게 된다.

불쌍한 소피아. 그래도 여전히 백화점을 좋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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