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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그미 Apr 16. 2023

나의 자궁과 노동과 행정 이야기

첫출근 후일담 

여러분이 신입직원을 맞이하는 반갑고 긴장되는 자리에 앉은 팀장이라고 가정해 보자. 사무실 냉장고에 들어있던 시원한 비타500 한 병씩을 붙잡은 채, 그의 첫인상부터 찬찬히 뜯어보며, 우리 부서에서 첫 업무를 시작하게 된 이 녀석이 바탕은 얼마나 갖췄는지, 사회생활의 기본 예절이란 것을 갖추고는 있을지 없을지, 팀장으로서 나는 이 녀석의 업무를 어디부터 어디까지 손대줘야만 할지 감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임신 7개월째라는 자기 소개를 듣고부터는 머리가 조금 하얘질지도 모른다. 사실 신입에게 줄 자리는 정해져 있었는데, 이 사람이 임신 7개월이라면 그 자리에 앉히기가 조금 난처한 상황이라는 계산이 나온다던가 하는 경우에 말이다. 

그런 순간에는 일단 오늘은 첫날이니 일찍 들어가 쉬고 내일부터 본 업무를 배우고 해보라는 말을 하며 퇴근시키고, 비상회의를 시작하면 된다. 

우리 팀장님은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임용받은 날은 2021년 8월 31일이었다. 면접발표 후 한 달이 안되어 신규자 임용이 시작되었는데, 나는 그 며칠간 사이에 결국 그대로 임용되어 일하다가 아이를 낳는 길을 택했다.  

"몇 년만 뻔뻔하게 지내면 돼. 그 후면 다들 잊어버릴 거야. 일할 날은 기니까."

그런 격려같은 말을 들었다. 내 나이가 많아서(그때 33살이었다) 하루라도 일찍 시작해야 호봉이든 무엇이든 챙길 것을 챙긴다는 조언도 있었고, 아이는 내가 다 봐줄테니 육아휴직 할 필요가 없다, 회사에 걱정 말고 이야기하라는 어머님의 응원도 있었다. 

그러나 동생의 친구는 공무원임에도 정기인사 때 옮겨간 새 팀에서 '임신한 애를 데리고 무슨 일을 하라고!'라며 언짢아하는 팀장의 가시 돋친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남편은 학기중 출산휴가로 일을 마치지 못하고 가버린 동료 선생님 때문에 학교가 대체인력을 구하는 상황이 얼마나 난감했는지 말해준 적이 있다. 남편의 동료는 내 이야기를 듣고 아이를 낳은 후에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내심 아이를 낳고 천천히 시작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네 분이나(결혼하면 부모님이 많아진다) 당장 일을 시작하라고 한목소리가 되어 조언하시는 통에 결국 일을 저질러버리고 말았다. 3년동안 집에서 나이만 먹은 게 조금 면목없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결정은 내 몫이다. 휩쓸렸다고 탓하든, 아니었다고 당당하든. 


부서 배치 첫 인사 후, 짧은 자기소개 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과장님과 팀장님, 보안때문에 공무원증을 대야만 동작하는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러주며 나를 배웅하는 서무님 반응이 왜인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미 뻔뻔해지라는 조언을 가슴에 품고 들어와버렸기 때문에, 눈치가 없는 뻔뻔함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울었다. 아무도 나에게 화를 내지 않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두렵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다음날 출근하기가 몹시 싫었다. 당장이라도 취소하고 싶었다. 그 전의 결정을, 이날 하루 전체를. 


일한 지 1년이 넘어서야 들은 이야기로는, 그날 내가 집으로 간 후 부서 내에는 신입이 임신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고, 그 이야기를 듣는 직원들 사이의 공기는 숙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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