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 (10)
*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무언가 결정하지 못 하겠을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아무거나 결정해버리는 거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기.
이제는 스타 감독이 된 하마구치 류스케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아사코> (원제: 아사코 1&2)에서 주인공 아사코는 두 번의 ‘결정적 결정’을 내린다. 그 중 두 번째 결정은 첫 번째 결정을 되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오사카에 사는 아사코는 갤러리에 방문했다가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남자 바쿠를 만난다. 바쿠가 태어났을법 한 그림은 보티첼리의 선명한 그림이 아니라 다빈치가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는 언제나 현실에서 발을 떼고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고, 아사코와 눈을 마주치고 있어도 아사코가 아니라 그 뒤의 어딘가를 보는 것 같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신기하리만큼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바쿠 같은 사람은 위험하니 주의하라는 친구들의 걱정에도 아사코의 마음은 한 치의 구부러짐 없이 바쿠를 향한 직선대로로 쭉 뻗어 있다. 친구의 걱정은 평화로운 어느날 불현듯 현실이 된다. 신발을 사 오겠다며 집을 나선 바쿠가 그대로 사라진 것이다. 일본어 타이틀(자도 깨도)은 바쿠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 나래이션 직후 스크린에 영사된다.
2년이 조금 지난 뒤 도쿄로 거처를 옮긴 아사코는 인근의 사무실로 커피 배달을 하러 갔다가 바쿠와 똑 닮은 사람을 만난다. 겉모습은 바쿠와 똑같지만 성격은 정반대인 료헤이는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는 사람이다. 사진전을 봐도 뭐가 좋은 건지 전혀 모르겠다며 스스로를 예술에 문외한이라고 칭한다. 그의 가장 큰 고민은 회사 생활이다. 아사코는 바쿠와 닮은 료헤이의 외모로 인해 관심을 갖다가도 이야기하면 할수록 둘이 정반대의 사람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료헤이의 구애로부터 매번 도망치기만 하던 아사코는 어느새 바쿠를 잊고 료헤이와 함께하기로 한다. 아사코와 료헤이가 몇 년의 순조로운 연애 끝에 결혼을 약속한 직후, 과거의 연인 바쿠가 아사코 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그 사이 떠오르는 신예 모델이 된 그는 떠났을 때처럼 예고 없이 아사코를 찾아와 함께 떠나자고 제안한다. 그 제안을 여러 번 거절하던 아사코는 친구들과의 식사자리에서 불현듯, 갑작스럽게 바쿠와 함께 떠난다.
아사코는 식사 자리에서 뛰쳐나가 바쿠와 함께 홋카이도로 향하던 중 잠에 든다. 그리고 어느 바닷가에서 깨어나 ‘바쿠는 료헤이가 아니야’, ‘나 지금까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어’라며 바쿠에게 이별을 고한 뒤, 그 길로 료헤이에게 돌아가 다시 함께하자고 말한다. '너를 증오한다'고 말하던 료헤이는 끝내 아사코를 집안에 들인다. 함께 살기로 약속한 집 베란다에 서서 둘은 흐르는 강을 바라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한참 동안 내린 비로 불어난 강을 보며 아사코와 료헤이는 이렇게 말한다. “더러운 강이네” “더럽지만 아름다워”
아사코가 내린 두 번의 결정은 첫째 바쿠와 함께 떠나는 것, 둘째 료헤이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영화를 원제처럼 두 파트로 나눈다면 아사코의 중대한 두 가지 결정이 기점이다. 첫 번째 결정을 하기까지의 아사코와 두 번째 결정부터의 아사코. 제목까지 붙일 정도로 여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아사코1은 어떻게 아사코2가 되었을까?
먼저 아사코1을 보자. 아사코1의 존재는 미약하다. 늘 바쿠의 뒷모습을 좇고, 바쿠가 어디론가 사라지지는 않을지 걱정한다. 자신에 대해 료헤이가 갖는 관심은 부담스럽다. 바쿠와 닮은 그가 궁금하지만 적극적으로 다가가 정말 바쿠와 다른 사람인지를 확인할 만큼의 용기는 없다. 아사코1이 료헤이를 보는 방법은 곁눈질로 다른그림 찾기를 하는 것이다.
아사코와 바쿠가 홋카이도로 향하는 장면은 다소간 환상적으로 표현된다. 막 잠에서 깨어난 아사코의 상태와 희뿌연 질감은 이 장면을 꿈 속처럼 보이게 만든다. 또 아사코가 입고 있는 흰 원피스와 바닷가라는 공간적 배경은 영락없이 삼도천 내지 스틱스강이다. 이런 장치는 바쿠가 현실의 인물인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동시에 아사코의 재탄생을 암시한다.
내내 소극적이던 아사코1은 '바쿠는 료헤이가 아니야'라는 대사와 함께 아사코2가 된다. 료헤이는 바쿠가 아니어서 사랑하지 못 했지만 바쿠는 료헤이가 아니라 함께할 수 없다. 바쿠를 떠나 료헤이와 함께하기로 결정하는 아사코2의 모습은 놀라우리만치 당당하고 분명하다. 료헤이에게 함께하자고 말할 때의 눈빛도 그렇다. 정면에서 똑바로 료헤이를 바라보는 아사코의 눈빛은 으레 생각하는 전 애인에게 달려가 다시 만나자고 애걸하는 사람의 그것과 영 딴판으로, 비굴하기보다 단호하고 형형하다. 바쿠의 뒷모습을 좇고 료헤이에게서 도망치던 과거의 아사코, 마음 한 귀퉁이를 줄곧 바쿠에게 두고 있던 아사코, 고개를 숙이고 말하던 아사코는 홋카이도까지 이어진 길 위에서 사라졌다. 이제 아사코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더럽지만 아름답다. 바쿠라는 과거를 마주하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었던 확신이기 때문에, 곁눈질만 하던 아사코가 마침내 과거의 상처를 마주보고 마침내 극복했기 때문에. 눈앞에서 과거의 레이어를 걷어낸 아사코는 더이상 료헤이의 얼굴에서 바쿠를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료헤이는 '바쿠를 닮은' 료헤이가 아니라 '료헤이'다. 결국 아사코가 선택한 것은 미화된 과거가 아니라 더러운 현재다. 너절하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어떤 사건을 겪은 후에야 인생의 챕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