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네가 우리를 대표해야 한다.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자들의 이즘. 나는 그것을 민머리주의라 이른다."
승광의 벗은 머리에서 빛이 났다.
나는 눈이 부셔 그의 태를 감히 볼 수 없었다.
태초의 빛이 그의 머리 위에서 아롱지고 있었다.
*
"싫어요."
"아니 저 정차장. 일단 장수 대리 말을 들어보자구. 무조건 싫다고 할 게 아니고. 어쨓든 장수대리의 사숙이라지 않는가."
"싫단 말이에요. 민머리라니. 지금 저보고 머리 빡빡 밀라는 말씀이세요?"
정미인이 회의실에서 토라진 듯 등을 돌리고 오팀장에게 말했다.
"민머리가 어때서? 민머리가 뭐 어대서 그래?"
오팀장이 버럭하였다.
"팀장님은 이미 머리가 없으시잖아요. 그리고 전 여자라구요!"
정미인이 얼굴을 붉혔다.
"내가 머리가 왜 없어? 내가 머리가 왜 없어? 여기. 이거 안보여? 여기 옆머리랑 앞머리. 여기 이거 안보여? 이건 머리 아니야?"
오팀장이 옆으로 간신히 쓸어 이마를 가린 머리를 보이며 말했다. 그의 머리카락에 힘이 없었다.
"아니. 그거랑 이건 다르죠."
정미인이 어이없다는 듯 오팀장에게 혀를 둘렀다.
정미인이 긴 머리를 뒤로 둘렀다.
"자. 자. 진정하시구요. 일단 장수대리의 말을 들어봅시다. 우리끼리 지금 반목해서 되겠습니까. 일단 말을 들어보고 판단하시라구요."
주과장이 말했다. 주과장이 나를 보았다.
"... 저. 저기. 음."
내가 사숙을 보았다.
사숙이 무언의 지지를 눈빛으로 보내고 있었다.
나는 사숙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그. 그러니까. 민머리주의란..."
"민머리주의란 뭐요?"
정미인이 나를 봤다.
"그..."
내가 말했다.
"적을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대리님. 아니. 장수대리. 내가 아무리 장수대리한테 그간 못되게 굴고. 장수대리가 박부장도 물리치고 나회장도 물리쳤다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아? 갑자기 민머리주의라니. 나 이거 안해. 차라리 회사를 때려치고 말지."
정미인이 맞받아쳤다.
"아. 아니 차장님. 그게 아니라. 민머리주의란 아무에게도 적을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말했다.
"저. 저기. 여기 승광 사숙의 머리를 보세요."
모두의 시선이 승광의 머리로 쏠렸다.
"보세요. 자. 맨들맨들하죠?"
그랬다. 승광의 머리는 맨들맨들했다. 초년 시절 뵀을 때 부터.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쭈욱.
"자. 누군가 적이 있다고 칩시다. 적이 사숙을 치려고 해요. 이렇게 가까운 데서요. 그럼 적이 무엇부터 하겠습니까?"
내가 물었다.
모두가 나를 봤다.
나는 사숙의 머리를 잡았다.
미끄덩.
손이 미끄러졌다.
"이렇게. 이렇게. 머리채부터 잡으려고 하겠죠? 안그래요? 전투본능을 지닌 무림인이라면 우선 머리채부터 잡고 볼 겁니다. 왜냐하면 머리채가 공격에 가장 취약하거든요. 머리채 잡히면 무조건 끝입니다."
내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 손이 어떻게 됐죠? 여러분? 보세요. 자. 미끄러져지죠?"
나는 여럿 승광의 머리통을 잡았다 놓치기를 반복하였다.
그의 머리는 정말 매끄러웠다.
반들반들.
기름을 바른 돌과 같았다.
"이렇게 아무에게도 잡히지 않는다면. 누가 우릴 해할 수 있겠어요?"
내가 물었다.
손에 기름이 묻어있었다.
"과연 그래. 봐. 나도 여기 머리가 조금 있지만. 여기 앞 대가리는 어떻게 해서든 잡을 수 없어. 이것봐. 안그래? 정차장?"
오팀장이 이마를 짚었다.
이마의 살이 쭈그러졌다.
"여길 잡으면 되죠. 여길."
정미인이 사정없이 오팀장의 옆 머리채를 쥐었다.
"아. 아. 아파. 아파."
오팀장이 소리쳤다.
"머리빠져. 이거 놔. 머리 빠진다고."
오팀장이 정미인을 걷어냈다.
"흥."
정미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미인이 팔짱을 꼈다.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그녀가 나를 봤다.
"누가 머리를 밀건데요?"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안돼."
주과장이 말했다.
"왜요? 과장님?"
내가 물었다.
"이대리는 결혼했잖아. 난 아직 결혼도 못했다고. 요새 만나는 여자 있어."
냉정한 사람.
이럴 줄 알았지.
"나도 안돼. 미안해 이대리."
오팀장이 말했다.
"티... 팀장님은 이미 몇가닥 없으시잖아요. 그게 그거일 거란 말이에요. 왜 안되세요?"
내가 물었다.
"나 약 먹어. 그리고 이거 심은거야. 여기 몇 천은 들었어..."
오팀장이 말했다.
"나는 한번 밀면 다신 안나와..."
불쌍한 사람.
흑.
"왜 날 봐요?"
정미인이 말했다.
"차. 차장님 두상이 예쁘신 것 같아서..."
"두상 같은 소리하고 있네."
정미인이 물티슈를 던졌다. 물티슈가 얼굴에 맞고 떨어졌다. 물티슈를 맞고 차라리 쓰러지고 싶었다.
"장수야."
사숙이 말하였다.
"너 밖에 없구나."
승광 사숙이 말하였다.
그가.
나를 보며 머리를 쓸고 있었다.
그의 머리가.
맨들맨들.
아지랑이 피듯 맨들리고 있었다. 나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배경화면은 다케히코 이노우에님의 배가본드에서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