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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곰 Sep 05. 2017

8. 잘 사는 척하지 말고 연락해

이직이라니..

오랜만에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다. 출장이다 뭐다 해서 은근 자주 올라갈 일이 있지만, 빡빡한 일정 때문에 개인 적인 업무는 거의 보지 못한 채 내려오곤 했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부산에 내려온지도 꽤 되었다. 다행히 발령이 다른 회사에 비해서 비교적 어렵지 않은 특성상 고향으로 내려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라 내가 내려간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참 할 말도 많고 이유도 많았지만 일일이 설명한들 무엇하나.. 마침 이런 내 생각을 아는 것처럼 그냥 지레짐작하듯 별 말없이 손을 내밀어 소회를 밝히는 동료들이 고마웠다.


내려올 때도 큰 감정의 동요 없이 내려왔었으므로 오랜만의 업무로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내겐 부담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생각이 났다. 회사는 애증의 존재라고 말하던 시기보다는 애증의 경계가 많이 허물어져 그런 기억들이 가슴 어딘가를 후벼 판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ㅎㅎ 감성적이 되곤 했다.


내가 지금껏 이 회사를 다니면서 만났던 분들 중에 좋았던 분도 있고, 안 좋았던 분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따르던 선배가 있었는데, 마침 이번 출장을 통해 오랜만에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일을 참 잘하고, 냉정하게 말을 해도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던 선배였는데, 내가 회사에서 적응 못할 때도 형식적인 말이 아닌 속이 뜨끔할 만한 말들을 많이 해주던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냥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충격적인 말을 내게 했다.


내일 퇴사를 한다고 한다.


정확히는 이직인데, 우연찮게도 이 회사에서 근무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처음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한테 꾸준히 말해 주었던 여러 조언들이 가지는 의미와, 그가 회사 내에서 가지는 입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팀 내에서도 그에게 의지를 많이 할 만큼 일을 잘 했고, 본인 스스로도 일에 열정과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회사에 불만이 없진 않았지만 사실 그건 불만이라고 하기에 우스운 수준이었고, 거짓말 조금 보태서 미래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저는 납득이 잘 안되는데요?ㅎㅎ"

"왜?"

"여기 계시면 승승장구하실 텐데, 거기 조건이 엄청 좋은 가봐요?"

"아니야, 물론 나쁘진 않은데 그래서 가는 건 아니야"

"그럼 왜 가요?"

"... 재미가 없어..."


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충격이었다. 재미가 없어서, 그래, 이직을 할 수도 있긴 있는데, 적어도 내가 아는 그는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나라면 모를까 그는 아니었다.


여러 궁금증이 일었지만 어떤 질문부터 해야 할지 순서를 잃고 헤매고 있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내가 어떤 의견을 말하면, 다들 반대를 안 해.."

"응? 그거 좋은 거 아니에요?"

"음.. 내가 어떤 의견을 말하면 그게 최종 아이디어가 되어버려. 토론을 통해 이런저런 의견이 쌓이고, 어떨 땐 반대의견도 나와야 나 스스로도 생각할 것들이 늘어나고.. 그러면서 발전이 있는 건데 요즘은 그런 게 없어"

"그래도 선배님은 스스로 공부 많이 하잖아요? 팀 내에 반대의견이 없다 하더라도 학습으로 자기발전 많이 하는데, 그게 그렇게 큰 일인가요?"

"그게 그렇지가 않더라.. 한계가 있어, 공부랑은 또 달라"


그 뒤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또 연락을 하자고 약속한 뒤 우리는 각자의 장소로 돌아갔다. 솔직히 여기까지 대화를 주고받아도 나는 납득이 잘 안됐다. 나 같이 좀 무모한 경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신중하고 철저한 사람인데.. 그런데 대화가 끝나도 뭔가 쓸쓸함이 맴도는 뒷맛이 맘에 걸리더라.


모든 대화를 다 마치고 비로소 헤어질 때, 그의 충격적(?)인 이직 사유 때문에 후순위로 밀린 나의 안부를 물으며 그가 말했다.


"잘 사는 척하지 말고 연락해, 속에만 담아두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다녀, 그게 너한테 좋아"


이상하게 저 "잘 사는 척하지 말고 연락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별말 아닌데 울뻔했다.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이 아니라 진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나 보다.


희한한 타이밍에 이상한 위로를 받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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