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이다.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이었을까?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이 있었다. 다섯 명이 모였다고 ‘오인회’라는 단순한 이름의 모임이었다. 지금은 미국과 지방으로 뿔뿔이 헤어져 더 이상 모임을 갖지 않는다. 당시 주말을 이용하여 친구들끼리 산행을 하기로 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북한산이었다.
각자 사회에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느라 정신없이 살아갈 때였다. 한 친구는 발목에 모래주머니까지 차고 나타났다. 아직 힘이 넘치는 놈이다.
약 5시간 산행이 끝나고 내려와서 무슨 가든이라는 이름이 붙인 고깃집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친구들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 하니 기분이 좋았다. 밖으로 나오니 벌써 어둑해졌다. ‘고깃집을 왜 가든이라고 부르지?’라고 평소에 생각했는데 이 집은 정원이 넓었다. 가든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했다. 정원 한쪽 구석에는 모닥불까지 피워두고 있었다. 총무를 맡은 내가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한 친구가 모닥불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이면 하염없이 앉아있다.
내가 다가가서
“이제 그만 집으로 갈까?”
“아니 조금만 더 있다 갈게, 먼저 가...”라고 하는데 표정이 아주 센티멘탈하다.
나머지 친구들도 함께 모닥불에 잠시 앉아 있다가 일어서려는데,
처음부터 앉아 있던 친구가 갑자기
“바다를 보고 싶다”
라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다들 갑자기 왜 생뚱맞게 바다를 보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사실, 친구들은 서로 터놓고 얘기는 않지만 직장에서의 스트레스와 함께 일상의 단조로움으로부터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꿈틀고 있었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오십 언저리를 지나고 있었지만 여전히 삶의 방향은 오리무중이었고 가족과 작장에서의 삶의 무게는 더해갔다. 나 역시 그러했다. 자유롭고 싶다는 갈망과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를 보곤 했다. 그 친구는,
“그냥 바다를 보고 싶어”
“그래? 그럼 인천 앞바다라도 갈까...?” 누군가 대꾸를 한다.
그 친구는 조금 멀리 가고 싶다는 거다.
한참을 서로 어딜 갈까를 얘기하다가 누군가 태안 앞바다로 가자고 제안한다. 일단 지나가는 택시를 불렀다. 기사한테 물어보니 요금만 두둑이 주면 갈 수 있다고 했다. 친구들 모두 얼큰하게 취한 상태라 다들 동의했다. 내가 앞자리에 타고 출발했다. 서울을 벗어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불안하기 시작했다. 혹시 빗길에 미끄러져 사고라도 나면? 우선 아내에게 전화했다. 여차해서 태안으로 가는 중이라 오늘 못 들어간다고 했다. 아내 역시 불안한 목소리로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했다.
서울을 벗어나니 기사는 속도를 더 내기 시작했다. 안양을 지나면서 한 친구가 제안을 한다. 모두 집에 연락하지 말자고. 일탈을 하고 있는데 집에 연락하면 괜히 걱정만 한다고. ‘난 벌써 연락했는데?’ 속으로만 생각하고 지나쳤다. 비는 오고 길은 미끄러운데 밖은 헤드라이트 빛만 앞을 희미하게 밝히면서 온통 세상이 캄캄했다.
앞자리에 앉으니 더 위험천만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결국 차는 바닷가에 도착했다. 다들 백사장으로 걸어 나갔다. 오로지 바다를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하지만 어둠으로 짙게 깔린 바닷가는 짙은 안개가 앞을 가로막아 전혀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파도 소리만 들렸다.
어둠과 안개가 엉켜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파도소리만은 멀리서부터 시작되어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한참을 그곳에 서 있었다. 안개는 더 짙어졌고 파도소리 또한 더 깊어졌다. 그 칠흑 같이 어두운 순간, 시간과 공간의 감각마저 사라지고 오로지 파도소리만이 나를 조용히 위로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낯선 공간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도 없는 시간의 흐름마저 정지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때, 옆에 있었던 친구가,
“춥다, 빨리 숙소로 들어가자!”라는 말에 다시 현실 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 순간의 기억은 나의 뇌리에 아직도 남아있다.
택시도 그 시간에 서울로 돌아갈 수 없어 기사와 함께 여관에 가서 고스톱을 잠깐 치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해장국을 먹고는 다시 그 택시를 타고 아주 익숙한 공간인 서울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 해프닝은 매일의 단조로움과 직장에서의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낯선 시간과 공간을 찾기 위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하룻밤 일탈이었다.
우리는 항상 일탈을 꿈꾼다.
그렇게 지천명의 시간에 어쭙잖은 일탈을 꿈꾸었다.
오늘 아침, 문득 거울 속 나의 얼굴을 마주했다.
28년 간 보낸 대학에서의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성적까지 마감한 홀가분한 기분이다. 거울에는 익숙했던 나의 얼굴이 낯설게 다가온다. 65세.
시간의 흔적이 얼굴에 나타난다. 주름진 눈가와 깊은 입가의 주름과 함께 은빛이 도는 머리카락이 내게 속삭인다. ‘너는 지금까지 참 많이 견디고 살았구나....’라고 말이다. 그 주름과 탄력을 잃은 피부가 세월의 흔적을 드러낸다. 마치 살아온 나의 이야기를 그림처럼 얼굴에 그려 내고 있었다. 젊은 날의 피 끓는 열정과 중년의 고단함, 그리고 이제는 무심한 고요함으로 채워진 내 얼굴을 찬찬히 훑어본다.
거울은 내게 묻는 것 같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니?” 이 질문 앞에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내가 했던 선택들, 이루지 못한 꿈들, 놓쳐버린 기회들. 이런 것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공자는 이순의 나이에 귀가 순해지면서 모든 일을 순리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잘 살아온 걸까?’라는 질문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내 앞에 머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감정은 평온함이 느껴진다. 65세라는 숫자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움받고, 배우고, 가르치고, 경험한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함이 밀려온다. 젊은 날 쫓기듯 살았던 시간들, 성공에 목말라하고 실패에 좌절했던 순간들, 사랑하고 아파했던 기억들.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만든 소중한 조각들임을 느낀다.
65세라는 세월을 지나는 지금,
이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더 이상 남들의 시선이나 기대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내가 원하는 삶,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다. 나는 아직도 일탈을 꿈꾼다.
마음을 정리할 길이 없을 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 모든 것이 흩어질 때, 그럴 때 사람들은 바다를 찾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일상의 답답했던 마음에 숨통을 틔운다. 거대한 파도 앞에서 내 고민도, 걱정도 결국 사소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밤늦은 시각에 태안반도 해변으로 가서 파도를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일상 속에서 풀어내고 싶다. 평생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가 있다. 젊은 시절에는 말할 용기가 없었고, 중년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왔던 이야기들이다.
이제 65세, 나는 수필과 시 그리고 캘리그래피로 그 모든 것을 풀어내고 싶다. 일상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늦은 나이에 시작하는 두려움과 함께 설렘도 있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이 나이에 무슨 시를 쓰나?’ '느닷없이 웬 캘리그래피..?'하고 말이다. 그러나 시는 나이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는 내가 살아온 흔적이고 마음의 풍경이며, 침묵으로 채워둔 감정의 창고다. 내게 시는 솔직한 고백이 된다. 이 나이에 시를 쓴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며 나와 세상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다.
영화 <패터슨>이 생각난다. 주인공 패터슨은 미국 뉴저지주의 똑같은 이름의 패터슨이라는 소도시에서 버스기사로 일한다. 매일 아침 6시 15분에 눈을 뜨고 도시락을 들고 출근한다. 패터슨은 운전하면서 시를 떠올린다. 이렇게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패터슨은 유일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아침 운행하기 직전에 운전석에 앉아 시를 쓴다. 점심시간에도 벤치에 앉아 시를 쓴다.
패터슨은 시를 쓰는 시간에는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상상을 한다. 생업과 생활의 익숙함 속에서 일탈을 감행한다. 패터슨은 성냥을 보면서 혹은 버스를 스쳐 지나가는 폭포 등의 사물을 관찰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 낯이 익은 일상 속에서 낯선 무언가를 찾으면서 시의 운율과 리듬으로 일탈을 하는 것이다. 패터슨은 일상의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일상의 삶이 예술이 되는 시간이다. 그것이 시를 향하는 마음이 아닐까?
처음 시를 향하여,
떨리는 손으로 펜을 잡는다. 65년의 이야기를 담아 종이 위에 시를 쓰고 싶다. 아침 햇살이 깊게 들어오는 겨울철 창가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65세의 나는 여전히 배우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꿈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