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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므소 Jul 31. 2022

<水녀-13> 그 남자 그 여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났다. 남자는 건축가였다. 그는 ‘클로이 호텔’을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호텔을 완성해 나갔다. 호텔 개업을 코앞에 두고 누군가 한 남자를 찾아왔다. 클로이였다. 여자는 큰 배신감에 말을 잊지 못했다. 여자는 클로이가 그의 할머니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오해였다. 남자는 뛰어가는 여자를 붙잡지 않았다. 한참 뒤, 여자를 찾아왔다. 그녀의 등 뒤에서 가만히 말했다. 시작은 클로이였지만, 더 이상 클로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이름을 바꾸기엔 호텔을 너무 많이 지었고, 시간이 없었을 뿐이라고.


많은 여자가 이 장면에 분노했을까? 이 남자에게 육두문자를 뱉었을까? 나는 이 남자의 말을 이해했다. 시작은 클로이였지만 클로이는 이제 의미 없다는 말. 남자에게 클로이는 자기가 짓고 있는 숙박 시설을 나타내는 대명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됐다는 뜻이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서, 클로이라는 세 글자가 주는 일상성과 평범함이 그에게 어떤 경각심도 주지 못한 것이다. 새로운 여자를 만나기 전 호텔 이름에서 클로이를 지워야 한다는 사실, 이조차 지각하지 못할 정도로.


연애하면서 지난 남자친구들에게 ‘물건은 물건일 뿐’이라는 대답을 들은 적이 꽤 있다. 전 애인과의 물건을 추억의 산실로 여겨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는 나로서는 신기했다. 물건을 오롯이 기능 그 자체로 본다는 시선이 차가워 보이면서도, 물건에 지난날의 추억을 지지부진하게 달고 다니는 내가 촌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시대에는 전자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 다수다. 물건에 과거의 시간을 투영하는 행위는 비효율적인 일 중 하나로 간주되니까.


회사 동기 A는 전 애인이 준 에어팟과 함께 출퇴근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 2시간가량을 에어팟과 동고동락하지만 전 애인 얼굴이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고 했다. 대학 동기는 B는 CC였던 전 애인이 7년 전 생일 선물로 사준 지갑을 아직도 들고 다닌다. 그 지갑 한편에는 CC 이후 세 번째 여자친구 사진이 들어있다. 고등학교 친구 D의 통장 비밀번호는 0516. 첫사랑 생일이다. 처음으로 은행에서 체크카드를 만들던 시절, 그때 사귀던 남자친구의 생일이 하필 5월 16일이었던 것뿐. 상대가 누구였어도 그 사람의 생일이 D의 비밀번호가 됐을 것이다. 지금은 D와 그의 예비 신랑의 청약 통장 비밀번호가 0516이 됐다.


수영장 이곳저곳에도 바지 자락 끝에 묻은 빗물처럼 찰나의 순간들이 얼룩져있다. 같이 오르고 내려갔던 탈의실 계단, 함께 쓰던 사물함, 서로가 잘났다며 뽐냈던 전신 거울, 먼저 타겠다고 몸 싸움하던 낡은 엘리베이터, 물이 졸졸졸 나오는 정수기 앞에서 일부러 500ml 물통을 원샷 해버린 순간들. 그럼에도 나에게 수영장은 오롯이 수영장이 됐다. 누군가와의 추억이 매달려 있는 기억 저장소가 아니다. 폐가 터질 것 같은 ‘음파 음파’가 하고 싶을 때, 한없이 무거운 두 다리를 있는 힘껏 차고 싶을 때,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심연으로 영원히 잠기고 싶을 때,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 우주 속으로 사라지고 싶을 때 찾는 곳, 그런 곳이다.


누구나 이런 도피처가 하나씩 있겠지. 수영장이 내겐 그런 곳이 됐다. 물론 클로이 호텔처럼 클로이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흔적을 끄집어내려 한다면 당연히 생각나고, 굳이 생각하지 않으면 떠오르진 않는다. 클로이 수영장이 앞으로 몇 번이나 이름을 바꾸게 될지 모르겠다. 아예 안 바뀔 수도 있고. 그래도 확실한 건 나를 감싸는 적당히 차갑고 낯선 수영장의 소독물은 1년 365일 내내 변하지 않는다. 이 한결같음에 고맙고,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나는 뛰어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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