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대낮의 한성대입구역 6번출구, 여자 한 명이 다리를 푼다. 어설프다. 무릎까지 오는 린넨바지, 허리에 두른 바람막이, 한 손에는 생수 한 병과 김밥이 든 봉지를 들었다. 드러난 종아리는 얄쌍하다. 근육이 없기 때문. 러닝화를 신은 그는 지도를 켜고 대뜸 ‘북악산’을 검색한다.
휴대폰을 들고 몸을 이리저리 돌려 방향을 찾더니 걷기 시작한다. 왼쪽으론 앳된 얼굴의 배낭 맨 대학생들이, 오른쪽으론 또각 대는 신발을 신고 커피를 든 직장인들이 지나친다. 그는 두 부류 중간 어디에 있는 걸로 보인다.
산과는 친분이 없었다. 집 뒷산도 20년간 관상용으로만 뒀다. 어차피 내려올 산 뭐하러 오르냐는 회의론까진 아니었다. 날 좋으면 한강을 가고, 기분 전환하러 친구를 만나는 편이었다. 그런데 친구들을 만나기 싫었다. 한강에 돗자리 펴고 드러누울 마음도 아니었다.
연이은 시험 낙방, 친구의 취업으로 자신감이 자유 낙하하던 때다. 잔디에 드러누워 왁자지껄하는 게 ‘팔자 늘어진 일’ 같았던 거다. 사람 없고 조용한 곳에서 햇볕을 쬐고 싶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팔자 좋아선 안 될 날 혹사하고 싶었다. 산에 가기 시작한 이유는 다소 가학적이었다.
가장 가고 싶은 회사의 공고가 뜬 7월이었다. 평지서부터 벌써 땀이 삐질삐질났다. 한양도성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보고 난 후부터는 오르막이었고 계단이 많았다. 사실 겉모습만 보면 체육 시간에 깨나 달리고, 공도 던졌을 것처럼 보인다. 아니, 그런 말을 종종 들었다. 가벼워서 산에서도 날아다닐 것 같다. 실상은 근육 빈곤층. 하체 근육이 없어서 금방 피로해졌다. 고등학생 때 스키장에서 넘어져 디스크가 터지는 바람에 허리도 약하다. 3대 500치는 남자도 안 낼 신음과 숨소리를 내면서 간신히 북악산 청운대에 도착했다.
서울이 잘 내려다보이는 쪽 땅바닥에 철퍼덕 앉아 김밥을 씹었다. 오른쪽으로 종로구랑 중구가 보였다. 거기엔 광화문과 을지로가 있다. 높은 회사 건물 천지인 곳. 아까 지나쳤던, 손에 커피를 들고 출입증을 맨 직장인이 빼곡한 곳. 그런데 내 자리는 없는 그곳. 산에서 내려가서 갈 곳은 햇빛 잘 안 드는 학교 독서실 뿐이다. 지난 1년간 손에 남은 게 없는 것 같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것 같단 생각이 몸을 눌렀다. 김밥과 물이라도 다 먹어 비우자고 생각했다.
땀이 식기 시작했다. 말바위안내소와 삼청안내소를 지나 광화문 옆길에 다다르는 길을 따라 하산했다. 피부에서 물기가 증발하면서 시원해졌다. 또각대는 신발을 신고 북악산 둘레길 흙바닥을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직장인이다. 기분이 침울하지 않다. 내 발걸음이 더 경쾌하다. 평일 낮 등산은 백수만이 누릴 수 있다. 후들대던 다리도 괜찮고 왠지 근육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학교에 가면 날 기다리고 있는 자기소개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근육을 키워 온 체력왕 지원자...’에 관하여...
홀로 산을 타는 다 큰 여자에 대한 이미지를 업데이트했다. 원래 <김삼순>이 한라산을 오르는 모습을 짠하게 기억했었다. 우비 뒤집어쓰고 비바람 맞아가며 우스꽝스럽게 등산하는 서른 살 백수 김삼순. 그런데 백록담에서 초코파이 먹으면서 마음 다잡은 김삼순은 돌아와 멋진 파티셰로 커리어를 잇는다. 청운의 꿈을 품고 청운대에서 김밥을 씹은 내 모습을 등치 시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