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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ff the record Dec 12. 2024

20. 기보사서 오리엔테이션 2

기억을 빌려주는 도서관

        


  

#1     



갑자기 돌변한 저승사자 1호가 내뱉은 한마디에 모두가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

마치 판타지 소설의 언령처럼 목소리의 파동이 느껴지는 듯 다가왔다.     


현수는 커피를 세팅하다 말고 난데없이 들은 ‘한심하다’라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그 사이 현수와 같이 있던 저승사자들은 납작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다.          



2호, 3호, 4호: 삼가, 염라대왕님을 뵈옵니다.

어인 행차이시옵니까?     


현수: 여... 염라대왕님이요?     


염라대왕: 민현수! 

네놈이 너무 한심해서 내가 저승에서 보다 못해 올라왔느니라!     


현수: 네... 염라대왕님.     


염라대왕: 네 놈!

언제까지 자기 문제를 여자들 치마폭에 숨어서 해결한 심산이더냐?     


현수: 그게...     


염라대왕: 꽃분이가 간청해서 네놈에게 저승의 신분패를 내주었다.

망자도 타인의 기억도 네가 보지 않도록 해주었지!

네놈의 할미는! 

매달 만월마다 그 늙은 몸으로 망자 버스를 맞이했지.

니 할미가 그때마다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망자들이 전부 만월 도서관에 들어갈 때까지 연신 인사를 하며 복을 빌었다.     


현수: 네?     


염라대왕: 오늘은 네놈을 위해 내가 친히 ‘기보 사서’라는 직책을 내려주었다.

그런데 네놈은 어찌 그깟 엽서에 휘둘려 제대로 누리려 하지 않느냐!

하물며 지금 네 놈의 거취 문제를 꽃분과 네놈의 할미 둘이서 의논케 하고!

어찌 아직도 회피만 하고 있느냔 말이다!     


현수: (말문이 막혀서)...     


염라대왕: 민현수! 

네 놈에게는, 이 염라가 한낮 귀신 나부랭이 같더냐?

어찌 내가 내려준 모든 것을 온전히 믿지도 누리지도 않느냐?

할 줄 아는 것이 치마폭에 싸여 두려워하는 것뿐이더냐?

기보 사서에 대한 거취조차도, 

왜 네놈의 할미와 꽃분이 나서야 하는 것이야!

언제까지 뒤에 숨어만 있을 것이야!               



현수는 정면으로 날아오는 주먹을 정통으로 맞은 기분이었다.

염라대왕의 호통에 단 한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랬다.

염라대왕은 저승을 관장하는 신이다.

그런 신이 준 저승의 신분패를 가지고도 늘 귀신을 볼까, 타인의 기억을 볼까봐 핸드폰을 강박적으로 체크했다.

매달 만월에 하던 망자 버스도 그간 흰 눈으로만 봤고 오늘에서야 제대로 보았다.


왜 그런 걸까?                    





#2     



“이 늙다리 아재가!

세상 사람이 다 염라대왕같이 무쇠 심장을 가진 줄 알아요?

인간이었던 적도 없으면 왜 산 사람의 트라우마에 대해 아는 척이에요!”               



꽃분 이모가 현수와 염라대왕 사이를 가로막았다.               



염라대왕: 꽃분아!

이 무슨 하극상이냐?     


꽃분 이모: 염라대왕님! 

인간은 신이 아니에요. 어릴 적 겪었던 일이 평생을 좌우한다고요.

현수의 잘못이 아니에요.

극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현수 할머니랑 나랑 얘기한 것도 우리 둘이 이 비밀을 제일 잘 알기 때문이구요.

무슨 결정을 우리한테 미루고 숨어요.

우리가 얘한테 비밀로 하라고 해서 얘 상태가 그런 거잖아요!

그것 때문에 애가 속앓이를 얼마나 했는데요!     


염라대왕: 속앓이?     


꽃분 이모: 우리 현수가 이 비밀 때문에!

친구는 많아도요. 제 속을 다 안 내보이는 애가 돼버렸다고요.

그래서 이 잘생긴 얼굴을 하고도 말이야~

아직도 연애 한번을 못 했다고요!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랬다.

현수는 모태 쏠로였다.


영호구 판산동의 무당촌네 동네 식구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대학 친구들은 미팅도 소개팅도 거절하는 현수의 성정체성을 의심하곤 했다.

현수는 모든 걸 사서 취업 후에 생각하겠다며 핑계를 댔다.     


비밀이 많은 현수는 친구는 깊게 사귀어도, 이성을 사귀는 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친구는 평생을 가지만.

연인은 헤어지면 끝인데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을 자신이 없었다.


도서관 어플이 없으면 귀신을 보고, 

타인의 기억을 보는 것도, 

할머니가 무당인 것도.               



꽃분 이모: 에그머니나!

내가 이거를...     


염라대왕: 흠. 흠. 

오늘은 내 더 있을 상황이 아닌 듯하니 이만 가보마. 

1호 사자를 잘 챙겨주거라.     


꽃분 이모: 네, 얼른 가기나 하세요!     


1호 사자: (주춤거리며 쓰러진다) 으흑!     


모두들: 1호 사자!               





#3               



제 몸을 찾은 저승사자 1호는 온몸이 추운 듯 부들부들 떨었다.

다행히 1호의 눈도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주변이 작게 소란스러웠다.


저승사자들은 저마다 맡은 바를 하느라 분주했다. 

2호는 추워하는 1호를 위해 담요를 챙겨 왔다. 

나머지 둘 중에 4호는 드립 커피를 내렸고 3호는 커피잔을 세팅했다.     


‘땡~ 땡~’, 

적정을 깨는 기분 좋은 테이블 종소리가 들렸다.               



사자 4: 이모님, 사서님.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1호 사자가 너무 추워해서 따듯하게 가제 천으로 드립 커피를 내렸으니 같이 드셔요들.     


2호 사자: 예예.

갓 내렸을 때 드셔야 맛있습니다.     


1호 사자: 어서요!

저 추워 죽겠습니다.     


3호 사자: (현수와 꽃분의 등을 떠밀며) 사자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커피 한잔씩들 하셔요.               



그렇게 저승사자들과 꽃분 이모 그리고 현수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 사이 또 누군가 팥알을 썼는지 자리의 분위기가 확 바뀌어 있었다.     


잘 길이 든 버팔로 가죽으로 만든 약간 긴 소파 2채와 1인용 소파 2채.

낮은 높이에 사각의 커피 테이블과 중앙에 놓인 낮은 도서관 스탠드.

영국식 본차이나 커피잔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현수와 꽃분 이모는 테이블 코너의 1인 소파에 각각 앉았다.


4명의 저승사자는 마치 이 둘을 관람하는 양 둘둘 씩 나누어 긴 소파에 앉았다.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4호 사자: 자자~ 한잔씩들 나눠 드릴게요.     


3호 사자: 우리 1호가 지금 제일 급하니까~     


1호 사자: (너스레를 떨며) 어흇!

(여러 장의 담요를 여미며) 따듯한 가제 커피가 들어가니 좀 살겠네요.     


2호 사자: 그다음은 우리 꽃분 이모~     


4호 사자: 자~ 현수씨도.     


현수: 네, 감사합니다.

사자님, 저 사실... 가제 커피는 처음 들어봐요.      


4호 사자: 아~ 그렇겠네요.

‘가제 커피’는 ‘저승 커피’에요. 

갓난쟁이들 손수건으로 쓰는 가제천에 저승산 원두를 넣고 핸드 드립해서 먹어요.

드리퍼에 종이 필터 대신 가제 손수건을 쓰는 것 말곤 이승의 핸드드립이랑 다른 게 없어요.      


2호 사자: 현수씨, 이 가제 커피가 와일드 한 매력이 있어요.   

종이 필터보다 가제 천이 성글어서 커피콩 특유의 기름진 맛이 많이 나서 맛나요.     


3호 사자: 크~

가제 커피가 한번 맛 들이면 계속 먹게 돼요.               



사실 저승사자들이 가제 드립으로 내리는 커피도 

망자들을 위한 이층 버스도 이승의 문명과는 다른 결이었다.     


저승은 현대가 아닌 고종황제 시절의 근대에 머물러 있달까?      

망자의 이층 버스는 증기 기관으로 달리는 버스이다. 증기 기관은 물이 끓을 때 발생하는 수증기가 에너지원이 된다. 

버스 1층의 맨 뒤에는 커다란 부뚜막과 가마솥 그리고 가마솥 뚜껑에 이런저런 파이프가 연결되어 증기기관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버스 운영을 위해 저승사자도 4명이 필요했다.


4호가 망자 이층 버스의 운전을 하면, 

1호는 1층과 2층을 오가며 망자들을 돌보고, 

2호와 3호는 부뚜막에 장작과 석탄을 넣고 가마솥에 물을 채우는 일을 했다.     


가제 커피를 한 모금씩 하니 

어색했던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듯했다.               



꽃분 이모: 현수야. 염라 대왕님 일은 미안하구나.      


현수: 괜찮아요. 

뭐... 염라대왕님 말도 맞는걸요.     


꽃분 이모: 에휴, 내가 죄인이야.

어린 너에게 너무 큰 비밀을 만들어서 트라우마가 된 것 같아.     


현수: 아니에요. 

비밀은 다 저를 보통 사람처럼 살게 해주시려던 거잖아요.     


꽃분 이모: 그래두~     


현수: 염라대왕님이 화내실 만해요.

저승 신분패가 있는데도 꽃분 이모도 할머니도 저를 지켜주시고 목소리도 내주시는데...

늘 두려워하고 숨고 싶어 했어요.     


4호 사자: 크흠.

아유~ 머리로 안다고 감정까지 후딱 어떻게 되는 게 아닌걸요.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3호 사자: 맞아요. 

망자들 보니깐 트라우마 그거는 쉽게 고쳐지는 거 아니던데요.     


2호 사자: 비밀이 이제 더 이상 비밀인 게 아닌 게 됐으니.

기보 사서님 점점 좋아질 거예요.     


1호 사자: 저기...

아까 염라 대왕님께 몸을 빌려드렸을 때 대왕님 감정이 전해졌는데요.

애정과 걱정이었어요.

미워서 혼내신 것 아니니 기보 사서님 너무 자책 마세요.     


현수: 감사합니다. 

(말 돌리며) 아! 가제 드립 커피 맛있네요.     


꽃분 이모: (말 돌리며) 우리 현수 입에 맞나 보네.~ 

그러고 보니 니가 만월에 오기 전까지는. 

홍여사님이랑 저승사자들이랑 이렇게 이 커피를 나눠 마셨었는데...      


4호 사자: 참! 다른 원두도 있는데, 

한잔 더 드실래요?     


현수: 좋아요!     


3호 사자: (커피잔을 치우며) 잠시 계셔요. 

디저트도 가져올게요.          



저승사자 2호, 3호, 4호가 자리를 뜨자 저승사자 1호가 슬쩍 덮고 있던 여러 장의 담요 중 하나를 현수에게 건넨다.

꽃분 이모는 그런 둘의 모습이 보기 좋은지 표정이 밝다.                    





#4     



1호 사자: 저희랑 같이 있으시니깐 살짝 서늘하시죠?


현수: 아, 괜찮아요.

추우실 텐데...     


1호 사자: 에이~

그러지 마시고, 편하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요.

저희가 망자만 알지 아직 산 사람은 잘 모르는 초짜 저승사자들이잖아요.

도와주신다고 생각하시고 다 말씀해 주셔요.     


현수: 그럴게요.

감사해요. 1호 사자님!               



현수의 표정이 한결 홀가분해진 듯했다.

그때였다.


1호 사자님 옆으로 뭔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저승사자 옆을 어른거리다니...     

도대체 뭐지? 

헛것이 보이나?               



4호 사자: 자~ 

가제 커피와 함께 먹을 에그 타르트가 왔습니다.     


2호 사자: 레이디 퍼스트로~

우리 이모님 먼저~     


꽃분 이모: 어머! 

이런 건 언제 다 챙겼어?     


3호 사자: 아까 잠깐 홍란 할매가 나오시더니 주고 가셨어요.     


꽃분 이모: 할매도 참.

입맛도 센스도 젊으시다니깐~     


1호 사자: 어휴!

일하다가 당 떨어지면 헛것도 보이고 그런다니깐요.     


꽃분 이모: 맞아.

나도 매점에서 주문이 몰려서 넋이 나가게 일하고 있으면~

홍란 할매 슬쩍 와서 바나나 우유에 빨대 꽂아서 입에 물려주고 가셔~

할매 아니었으면~ 몇 번은 쓰러졌지.     


2호 사자: 크~

꽃분 이모는 밥! 홍란 할매는 디저트!

이런 황홀한 양대 산맥이 있는 직장이 또 어딨나 몰라요!     


3호 사자: 저희가 이래서 만월 도서관 올 때마다 신이 납니다. 

신이 나!                



너스레를 떠는 저승사자들 덕분에 

커피와 에그 타르트까지 먹고 나니 마음이 쑥~하고 풀어지는 현수였다. 

저승의 마음 씀씀이도 산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3호 사자: (회중시계를 꺼내며) 어이구!

슬슬 망자들의 기억을 정리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꽃분 이모: (일어서며)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구나.     


2호 사자: 그냥 계세요. 두 분은~

앉아서 말씀들 나누세요.     


현수: 그래도 테이블 정리라도...     


4호 사자: 해뜨기 전까지는 저희는 어디 가지도 못해요.

여기서 두 분 말씀 나누세요.     


1호 사자: 네, 사서님

버스에 실린 망자들의 기억을 정리하는 거는 저희 임무니깐 신경쓰지 마셔요.

그러려고 여기 온 걸요.     


3호 사자: (커다란 보온병을 꺼내며) 꽃분 이모님.

보리차가 아직도 따듯해요.

이거 드시면서들 말씀들 나누셔요.                    





#5     



그렇게 저승사자 넷은 꽃분 이모가 준 보온병과 컵을 놓고 홀연히 버스 짐칸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수와 꽃분 이모 둘만 우두커니 남았다.               



‘꽃분 이모는 염라 대왕님 탓을 하셨지만.

그래도 내가 내 문제의 결정을 이모와 할머니한테 나도 모르게 미뤘던 건 맞아.

지레 겁을 먹고, 내 생각에 갇혀 있는 건지도 몰라.’               



꽃분 이모: 현수야.

오늘 여러모로 정신이 없지?     


현수: 괜찮아요. 이모.

만월 도서관 안에서라도 제 비밀이 더는 비밀이 아니게 된 게 솔직히 좀 숨통이 트여요.

뭔가 개운한 기분이에요.     


꽃분 이모: 그래?

음.               



꽃분 이모는 웬일인지 말이 없었다. 

어떻게 운을 떼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제일 좋은 단어를 고르는 듯했다.

현수는 그런 이모를 다정한 눈빛으로 재촉하지도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꽃분 이모: 현수야.

너 기보 사서를 하려면 말이야.

저승과 피의 계약을 해야 할 것 같아.     


현수: 그게... 뭐에요? 이모.     


꽃분 이모: 현수야.

피의 계약은 니가 산 사람과 망자 그 중간에 선다는 의미야.

이 만월의 밤에 너는 죽은 자가 되는 거지.     


현수: 제가 

죽어야 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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