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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ff the record Dec 16. 2024

24. 현수의 환등기

기억을 빌려주는 도서관

   



          

#1     



‘내 환등기가 왜 깨져있지?’           


    

거울에 비친 현수의 환등기는 

흰색, 황금색이 붉은색으로 잠식되어 있고 군데군데 금이 가 있고 깨져서 떨어져 나간 부분도 있었다. 


망자도 아닌 현수에게 환등기가 있다니... 

현수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울에 비친 민현수의 환등기는 지금껏 봤던 망자들의 2배 정도 짙게 붉었다. 현수 마음에 어린 어두운 감성이 오래되었다는 소리다.     

좋은 일한 걸 보여주는 환등기의 하얀 부분은 반 정도밖에 안 차 있었다.

아직 현수의 생이 많이 남았기에 이건 별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크게 깨지고 금이 간 부분인 현수의 황금빛 환등기 부분은 어딘가 이상했다.                



현수: 할매...     


홍란 할매: 이상하지?     


현수: 네...

전 왜 이런 거예요?

다른 망자들은 아무리 환등기가 붉어도 깨지거나 금이 간 사람은 없었어요!     


꽃분 이모: 현수야.

환등기의 금은 니가 예전에, 헤드폰에 붙은 잡귀에 놀라서 영혼이 빠져나갔을 때 생긴 흉터란다.      


현수: 그때 그 사건으로 생긴 흉터라고요?     


홍란 할매: 그런 큰일을 겪으면 다 하나씩들 있어. 환등기의 금으로 그날의 기억이 흉터로 남은 거란다. 그날의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고 아직도 남아있어서 그래. 

좋은 기억도 소중한 기억도 상처가 되는 과거에 영향을 받는단다.

니가 아직 그날의 일에서 다 회복되지 못해서 그렇게 보이는 거란다.     


현수: 그럼, 환등기가 깨져서 떨어져 나간 건요? 이것도 흉터인가요?     


꽃분 이모: 그건, 너처럼 영혼이 빠져나간 정도 아주 심한 경우에... 

죽을 뻔한 고비를 겪고 회복되지 못한 영혼에 남는 표식이란다.

심장정지가 왔던 환자나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다 살아난 이들에게도 이런 흉터가 남는단다.

저승을 한번 어렴풋이나마 경험하면 환등기의 조각이 떨어져 나가.          


     

현수는 자신의 비밀을 들킨 기분이 들었다.

기억에 금이 간 흉터, 깨져서 떨어져 나간 표식으로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자신이 거울 속에 보이는 듯했다.     

그때 현수의 시야에 매점 옆에 걸린 다른 거울이 보였다. 뭐에 홀린 듯 몸을 돌려서 그 거울에도 자신을 비춰보았다. 그러나 환등기는 보이지 않았다.     

현수가 뒤돌아서 홍란 할매와 꽃분 이모를 바라보았다.         


      

홍란 할매: (다시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며) 현수야.

이승에 기억의 거울은 이거 하나뿐이야.     


현수: (홍란 쪽으로 이동하며) 네... 할매.     


홍란 할매: (현수를 꼭 안아주며) 현수야.

모든 산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에 자기 ‘삶의 환등기’에 좋은 기억과 소중한 기억을 가득 채운단다. 지은 죄는 환등기에 남지 않아. 나쁜 것들은 저승의 법단 앞에 기록될 뿐이지.     


현수: ...     


홍란 할매: 기억에 금이 가고 조각이 깨져서 떨어져 나간 것 모두 다 말이야. 

살아가다 보면 금이 메워지고 새살처럼 깨진 부분도 돋아나. 다 괜찮아진단다.

그게 산 사람으로 산다는 것의 힘이지.     


현수: 제 환등기가 이런걸... 

그럼, 이모도 할매도 오늘 아신 건가요?     


홍란 할매: 짧게라도 저승은 경험한 이들의 환등기는...

우리 같은 저승 사서에겐 다 보인단다.     


꽃분 이모: 나쁜 건 아니야. 

그 사람이 하늘이 허락한 생을 다 할 수 있도록 돌보기 위한 표식이지.     


현수: 그럼 만월 도서관 사서님들도 모두...

제가 이렇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건가요?     


홍란 할매: 알고 있었지... 

말하지 않은 건, 너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고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란다.

현수 네가 살아갈 날 동안 예기치 못한 좋은 일로 회복될 수도 있는 거니깐 말할 필요가 없었어.     


꽃분 이모: 기보 사서 일을 하게 되면~ 

홍란 목욕탕의 이 망자의 찜질방 공간에 들어왔다가 기억의 거울을 보게 될 테니까...

혹시 설명도 없이 니가 자기 환등기를 보고 놀랄까 봐 보여준 거양.     


현수: 네...

제 환등기가 보여서

그래서 어릴 때부터 유독 저에게 잘해주셨던 건가요?

만월 도서관의 모두가요.     


꽃분 이모: 어머~ 그래도 오해는 하지마!

애는 자기 잘생긴 것도 모르더니~ 에이그! 

넌 떡볶이만 한번 맛있게 먹어도 환등기의 하얀 슬라이드 부분이 반 칸이나 찼었어!

그런 사람 진짜 드물다!

너가 그렇게 맛있게 먹어주고 행복해해 주는 걸 보는 게

나 같이 요리하는 사람을 얼마나 신나게 하는지 알앙?     


홍란 할매: 그럼! 

진짜로 맛있다고 말해주는 게 말이지, 현수야. 

하얀 거짓말로 예의상 듣는 ‘맛있다’의 100배쯤 요리사를 행복하게 해준단다.

너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였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서 만월 도서관 식구들은 너를 아끼고 아꼈던 거란다.     


          

거울 앞에서 선 현수의 어깨가 또 한 번 들썩였다. 

꽃분 이모와 홍란 할매가 그런 현수를 가볍게 다독이며 안아주었다.      


두 사람의 따듯한 다독임을 받으며 

현수는 할머니가 예전에 해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2     



할머니가 현수에게 해주셨던 말은 

헤드폰에 쓰인 잡귀에 놀라 영혼이 나갔던 현수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서였다.


자신을 구해준 저승 사서들에게 할머니와 함께 감사 인사를 하러 가기 전날이었다.     

그날 밤 홍여사는 현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다음날 현수 구출에 가장 핵심 인물이자 

홍여사가 가장 친분이 깊은 둘, 꽃분 이모와 홍란 할매를 직접 대접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 대접은 사실 천애 고아로 미혼모 자식의 아들로 태어난 손자, 현수를 위한 것이었다. 

이모나 고모할머니가 없는 현수에게 든든한 어른을 만들어 줄 심산으로 인연을 틀 계획이었다.      

홍여사는 자훈이와 설희의 부모님도 

너무 좋은 어른이고 현수에게 잘해주는 좋은 인연이라고 현수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현수가 그녀 연배의 어른에게 받을 수 있는 조건 없는 내리사랑을 받으며 크길 원했다.          


현수는...

2대에 걸쳐 양쪽 혹은 한쪽 부모가 원치 않는 데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닌가?          

어려도 똘똘한 현수가 그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남들과 다른 자신을!


현수가 어려서부터 귀신을 보고 말수가 적었던 건, 가정 환경 때문이라고 홍여사는 생각했다.

아이는 자신이 자랄 환경을 선택할 수 없으니...      

어린 현수가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현수와 할머니의 대화는 이랬다.     


          

홍여사: 수야, 현수야.

할미는 니한테 이 홍판덕이 동생 같은 사람 하나, 

할미보다 언니뻘의 더 할미인 사람 하나, 이르케 만들어 주고 싶다.      


현수: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할머니?     


홍여사: 수야, 우리 현수야.

사람이 있다 아이가, 나이를 억수로 많이 먹으므는...

우리 수야같은 아가 쪼매만 이쁘고 잘해도 마 줌치(주머니)에 든 돈 다 주고 싶은 맴이 든다.

내 눈에 이쁜 아는 마, 갸가 버릇없이 굴어도 그게 그리 이쁜 기라.

나이를 많이 묶으면 으른이 생각이 다 아(아이) 같아진다.

바보 된데이. 으른이...

근데 할미는 우리 현수가 그른 바보 같은 사랑도 많이 받아 받으면 좋겠다.     


현수: 할머니...

근데요. 진짜 나이 들면 그래요?     


홍여사: (눈물을 슬쩍 훔치며) 천하의 홍판덕이가 말이다.

나이가 무그니까는 바끼뿌드라! 느그 아빠한테는 할미가 니한테 하는 것만큼 못했다 아이가.

할미가 이런데...

내보다 나이 많은 홍란 목욕탕 할매,

내보다 쪼매 어린 꽃분 이모야 눈에는 니가 을마나 이쁠끼고?

테레비보니깐, 

아는 어릴 때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한다카드라.

할미가 니한테 그런 사랑 주는 으른을 여럿 맨들어 주고 싶어서. 

내일 밥을 사서 니를 위한 인연을 틀끼다.

안 그래도 이쁜 우리 수야가 쪼매만 들락거리면,

그 이모랑 할매부터 만월 도서관 사람들이 을마나 니를 이쁘다 할 끼고?       


현수: 할머니이~ 

할머니 눈에만 이쁜 거에요.             

      



 

#3     



‘우리 홍 여사님이 맞고 

내가 뭘 몰랐네...’               



현수는 꽃분 이모와 홍란 할매의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따스함에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홍란 할매와 꽃분 이모는 눈으로 싸인을 주고받았다.

꽃분 이모가 먼저 운을 뗐다.     


          

꽃분 이모: 어휴~

홍란 할매, 이런 이야기는... 식혜라도 먹으면서 할까용?     


홍란 할매: 그렇지~ 어이구. 

아까 네가 가져온 살얼음 식혜가 다 녹겠다.

현수야, 얼른 가서 먹으면서 하자.     


현수: 네.        


       

현수는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꽃분 이모의 손에 이끌려 방석과 낮은 상이 있는 자리로 갔다.


자신 얼마나 망가진 사람인지 

만월 도서관 사서님들은 다 알고 있었다니 뭔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쁘지만은 않았다.     

여기서 만큼은 괜찮은 척, 안 아픈 척...

그런 ‘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4     



현수는 재빨리 

홍란 할매와 꽃분 이모의 방석을 보기 좋게 또 편안하게 벽 쪽으로 옮겨서 놓았다. 

나이가 들수록 등을 기대야 편한 이들을 배려한 것이다.  

   

방석을 다 놓고야 자리에 앉은 현수는 

3명분의 컵과 그릇을 세팅했다.

그런 현수를 흐뭇하게 보며 홍란 할매와 꽃분 이모도 자리에 앉아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홍란 할매: (식혜를 컵에 따라서 건네며) 현수야, 자 받아.     


현수: 네, 할매.     


꽃분 이모: (달걀을 까서 주며) 자자~ 내꺼도~     


현수: 네, 이모.     


홍란 할매: 현수야.

네 환등기는 기보 사서를 하면 훨씬 더 빨리 회복될 거니깐.

걱정하지 말아라.     


현수: 네?

기보 사서 일을 하는데 왜 제 기억의 환등기가 회복돼요?     


꽃분 이모: (팥 주머니를 상 위에 툭하고 놓으며) 현수야.

내가 저승 사서가 안식년이라고 했던 거 기억나니?     


현수: 네.     


꽃분 이모: 그건 이 팥 주머니 때문이기도 하단다.     


현수: 음... 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홍란 할매: (현수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며 재밌다는 듯) 아이고.

꽃분아 빙빙 돌리지 말고 후딱 말해줘라.     


꽃분 이모: 아휴 알았어요. 할매.

현수야. 

이 팥알과 팥 주머니는 우리 저승 사서와 저승 사자에게 금고이자 산해진미이자 특급 여행 같은 거란다.     


현수: 어... 이모... 죄송한데, 

약간 약 파시는 것 같아요.     


홍란 할매: 현수야. 

꽃분이 설명이 진짜 정확한 건데 말이야.

망자가 이승의 미련을 내려놓고 좋고 소중한 기억을 가지고 저승으로 무사히 가게 되면.

그 망자를 인도했던 저승 사서의 팥 주머니가 두둑해진단다.

봉급이 자동 입금되는 것과 같지.     


현수: 아!     


꽃분 이모: 이걸로 능력을 발현할 수도 있지만 먹는 걸로도 쓸 수 있어.

저승 사서만 가능한 건데, 먹고 싶은 걸 상상하면서 요요 팥알 하나만 먹으면 딱 먹으면!

실제로 입안 가득 원하는 양만큼 먹은 걸로 만들어 준단다.     


홍란 할매: 저승 사자에게는 불가능하고 저승 사서에게만 허락된 행복이지.      


현수: 아! 정말요? 

저승사자들이 저승 사서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게 진짜 잘 이해되는 대목인데요?     


꽃분 이모: 그럼!

원할 때마다 여행도 갈 수 있단다.     


현수: 네에....?

어떻게요?     


홍란 할매: 아주 쉬워.

먼저 가고 싶은 나라의 여행책을 만월 도서관에서 빌리면 된단다.     


현수: 빌리고 나서는.... 요?     


꽃분 이모: 할매, 

이거 말로만 하긴 좀 그런데용?     


홍란 할매: 그렇지?

내가 제주도 여행책 빌려 놓은 거 있어.     


꽃분 이모: 늘 두시는 프론트의 카운터 밑의 책장에 있죠?     


홍란 할매: 그럼~     


꽃분 이모: (손가락 스냅을 튕기며) 딱!

(손에 제주도 여행책이 손에 쥐어지자) 어머머머, 이거 최신판이네요?     


홍란 할매: (꽃분에게 책을 건네받으며) 어디 보자~

(페이지를 넘기며) 여기 이 호텔이 이번에 새로 생겼다는 데 여기 어떠냐?     


현수: 와! 

풍광이 엄청 멋진데요?

한쪽은 바다가 보이고 한쪽은 숲이 우거져 있네요.     


꽃분 이모: 어디 봐봐.

어머~ 여기 너무 좋다!

할매, 우리 여기로 해요?     


홍란 할매: 좋지~               



꽃분 이모는 

그 호텔이 있는 여행책 페이지에 손가락을 끼워 넣고 현수와 홍란 할매를 데리고 기억의 거울 앞에 섰다.

현수는 영문도 모른 채 

둘에게 이끌려 거울로 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호텔이 어딘가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 같은 데서 이 호텔을 본 건가’ 했다.      


꽃분 이모는 자신의 팥알을 하나 꺼내 들고는 기억의 거울에 던졌다.

팥알은 거울에 부딪혀 ‘또르륵 딱’하고 바닥에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꽃분 이모는 신이 난 얼굴로 현수의 손을 낚아채서 거울로 달려 들어갔다. 

홍란 할매도 함께였다.

셋을 거울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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