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빌려주는 도서관
#1
새벽 4시 30분.
저승 사관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의를 위해
‘딱밤’을
때리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것도 방자훈에게 딱밤을 때리기 위해서 말이다.
이유인즉 이랬다.
좀 전까지 홍여사의 가죽 노리개에 잠들어 있던 저승 사관은 불안한 듯 한 자리를 맴도는 발걸음에 잠이 깼다. 분명 홍판덕 여사의 발소리였다.
저승 사관은 홍여사가 놀라지 않도록, 가죽 노리개에서 나와 테이블에 노크하듯이 소리를 내었다.
“똑똑”
저승 사관: 홍 여사님.
홍여사: 아이고, 사관님요.
우리 자훈이 좀 어찌 해주소. 내 쫌 도와주소!
저승 사관은 홍여사의 왼쪽 눈썹 쎌쭉 올라간 걸 보고, 침착하게 홍여사를 달랬다.
그녀가 필시 좋지 않은 미래를 본 듯했다.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요즘 저승 사관과 함께 있다가 보니 홍여사의 예지력이 이전보다 훨씬 좋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문제가 큰 문제가 되는 것까지 잡아낼 수 있었는데!
자훈이의 문제가 그랬다.
오늘이 자훈의 콘서트 마지막 날인데,
이날 무리한 앵콜 진행과 신곡 발표 이후부터 방자훈의 목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자훈은 하루 이틀 정도 목이 쉬지만,
밀린 스케쥴을 강행한다.
연말이지 않은가?
그러다 결국 설이 지나고 목에서 피까지 나서 잠시 활동을 쉬어야 했다.
그렇게 자훈이가 만든 신곡은 채 알려질 기회를 잃고,
내후년에 자훈이 컴백하면서 역주행으로 유명해진다는 것이다.
홍여사: 사관님요.
자훈이 골이 딩~~~하고 울릴 게 딱밤 한 대만 몰래 때려주시소.
아침에 일어나가 골이 딩~ 하믄 기력이 허해가 아픈 줄 알고! 조심할낍니더.
자훈이가 그라믄, 최 매니저가 난리가 나가 자훈이가 오늘 앵콜도 많이 못 하도록 말릴낍니더.
오늘 자훈이가 필을 받아가가 앵콜은 9곡이나 해삐가 목이 간다 아닙니꺼.
저승 사관: 9곡이요?
앵콜을요?
하... 여사님,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사오나
제가 산 사람의 생사에 관여하면...
홍여사: 딱밤 한 대가 으디 생사닙꺼.
딱밤 인데예?
그기도 딱 한 대!
저승 사관: 딱밤이라도...
제 손으로 하면 엄청난 충격이 갈 겁니다.
홍여사: 그라믄 사관님요.
새끼 손가락으로 딱밤을 때리면 안되겠습니꺼?
저승 사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새끼손가락이요?
음... 새끼손가락 딱밤이라.
염라대왕님께 여쭈어야겠습니다.
사관은 저승 노트를 꺼내어 염라대왕에게 연락을 취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염라대왕이 애매한 이 부분을 저승법전을 뒤졌으나 이렇다 할 항목을 찾지 못했다.
딱밤도 새끼손가락도 참 애매했다.
염라대왕은 오늘 치뤄질 사건을 저승 특별법으로 분류했다.
저승 사관이 가장 힘이 약한 새끼 손가락으로 산 사람에게 가하는 딱밤에 1대에 대해서는 폭력이나 개입이 아닌 ‘장난’으로 간주한다는 예외 항목을 남겼다.
#2
그래서 저승 사관은?
직접 자신의 새끼 손가락 딱밤의 강도가 어떤지 홍여사와 테스트를 해보았다.
사관은 맷집이 좋다 보니 아픔의 강도를 체크해줄 사람이 홍여사 뿐이었다.
딱!
소리가 온 방에 진동했다.
대역죄인이라도 된 듯한 표정의 저승사관과 여러번 새끼손가락 딱밤을 맞아 이마가 벌개진 채 싱글벙글 웃는 홍여사가 대조적이었다.
그래서 지금 새벽 4시 30분 저승 사관은 방자훈의 방에 숨어 들어왔다.
자신의 새끼 손가락으로 자훈에게 딱밤을 때리기 위해서.
방자훈의 목소리, 신곡, 내년 스케쥴 전체가 저승 사관의 새끼 손가락에 달린 상황이었다.
저승 사관은 비장한 표정으로
그 어떤 악귀를 벨 때보다 신중하게 방자훈의 옆통수에 일격을 가했다.
“딱!”
#3
“으으...”
방자훈은 옆통수의 약간의 고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손을 더듬어 만져보니 옆통수에 약간 혹이 난 듯 했다.
분명 설희랑 통화를 하다가 잠든 것 같은데 어떤 말을 했는지는 자훈의 기억 속에 없었다.
‘자다가 침대 옆 협탁에라도 머리를 밖았나?’
자훈은 혹이 날 법한 상황을 추측해보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핸드폰을 확인했다.
새벽 4시 반이 넘었다.
‘내가 잠결에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다가 다친 거겠지?’
하긴,
만약 설희랑 통화 중에 기절했다면 벌써 설희가 최 매니저 형한테 연락해서 한바탕 난리가 났을 거다.
머리 통증 때문에 자훈은 최 매니저 형한테 전화를 걸었다.
최 매니저: (잠결에 받은 듯) 여보세요... 자훈아, 왜?
자훈: 형, 나 머리가 아파. 어지러워.
지금 침댄데 어지러워서 못 일어나겠어.
최 매니저: (벌떡 일어난 듯) 어! 어! 어!
알았어. 말 그만해.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어.
일어나려고 하지마. 그러다가 넘어지면 큰일나.
내가 네 방 키 하나 더 가지고 있으니깐 바로 갈게 그대로 있어.
알았지?
자훈: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
미안 형.
최 매니저: 이게 니가 미안할 거냐. 자식이... 좀만 있어.
형이 바로 갈게!
최 매니저는 벌떡 일어나서 자신의 양손으로 양쪽 뺨을 박수를 치듯이 찰싹 찰싹 쎄게 때렸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였다.
자훈이가 보통 사람이라면 바로 방으로 달려갔겠지만, 하루에 수십억이 오락가락하게 하는 아이가 아프다. 아니 슈퍼스타가 아프다! 매니저인 그가 정신을 바짝차려야 했다.
최 매니저는 일단 호텔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를 꺼내어 벌컥벌컥 마셨다.
당장 메디컬 팀도 불러야 하고 여차하면 콘서트팀 스탭도 불러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진두지휘해야 할 리더는 최 매니저 뿐이었다.
그는 빠르게 스피커 폰으로 메디컬팀에 전화를 걸었다.
메디컬 팀장: (잠긴 목소리로) 네?
최 매니저: (옷을 갈아입으면서) 팀장님,
자훈이가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다고 합니다.
메디컬 팀장: 네!
팀원들 데리고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최 매니저: (야구 모자를 쓰며) 네, 자훈이 방에서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바로 방을 나온 최 매니저는 호텔 복도로 뛰어 나갔다.
자훈이 방과는 불과 3층 사이라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보다 걸어올라가는 게 더 빠르기 때문이었다.
#4
자훈은 최 매니저를 기다리던 그 잠깐 사이 까무룩 선잠이 들었다.
잠결이지만, 최 매니저가 들어오고 잠시 후 방에 들어온 메디컬 팀까지 느껴졌지만...
잠을 이길 수가 없었다.
자훈이의 긴장이 풀려서 인 듯 했다.
최 매니저가 먼저 자훈이에 방에 들어오고, 자훈이의 머리와 얼굴을 살폈다.
그 뒤로 메디컬팀이 우르르 들어와서 자훈의 상태를 확인했다.
메디컬 담당의가 어제까지 자훈이를 확인했을 때 피로 외에 별 다른 증상은 없었다.
하지만 간밤에 난 머리의 혹과 어지러움증 때문에 상태를 면밀히 볼 필요가 있었다.
당장 오늘도 콘서트라 어쩔 수 없었다.
담당의는 급한 대로 링거 처방을 해주었고,
자훈이 방 거실에서 모두 대기했다. 1시간도 안되서 자훈이 설풋 잠에서 깼다.
자훈: (눈을 뜨며) 형, 몇시야?
리허설 가야 하는데... 아! 왠 링거야?
최 매니저: 더 자.
아직 아침 6시도 안됐어.
자훈: (일어나려 하며) 뭐?
최 매니저: 잠깐만, 일단 너 깨어났으니
메디컬팀에 병원 진찰 일정부터 잡아달라고 해야겠다.
최 매니저는 호텔방 거실로 나가서 메디컬 팀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듯했다.
이번 제주도 콘서트에서 자훈은 이런저런 기구를 타고 몸을 움직이는 게 많아서 아무래도 CT 촬영을 하려는 듯 했다.
거실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끊기더니 최 매니저와 메디컬 팀이 자훈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자훈이 일어나려고 하자 최 매니저가 재빨리 자훈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
최 매니저: 누워있어.
메디컬 팀: 자훈씨, 그냥 듣기만 하세요.
지금 맞는 링거에 몇가지 약물만 더 추가해서 맞고 바로 병원으로 이동할 겁니다.
현재 상태로 바로 이동하는 것보다 링거 다 맞고 안정을 취하다가 병원에 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1시간 정도 더 푹 쉬세요.
메디컬 팀장의 말이 끝나자 마자 같이 들어온 간호사가 링거에 몇가지 약물을 더 추가했다.
팀장은 바로 병원에 전화를 거는 듯 가벼운 목례만 하고 다시 거실로 나갔다.
간호사까지 방을 나가자 최 매니저는 거실쪽 문을 닫아버렸다.
최 매니저: (한숨 돌리는 듯) 어휴. 자훈아.
의사쌤 말씀으로는 머리에 난 혹 때문에 CT 찍어보자셔.
CT 결과가 이상이 없어도 오늘 콘서트는 일단 무리하면 안된다셔.
자훈: 어...
최 매니저: 너 링거 다 맞으면 병원으로 이동해서 같이 체크할거야.
일단 누워서 링거나 다 맞아.
자훈아, 오늘 하려던 신곡 발표는 연말에 하자.
지금 컨디션에 무리야.
자훈: 형... 그래도.
이 노래는 꼭 콘서트에서 발표하고 싶어.
곧 연말이고 대목이라.
신곡 발표에만 힘 쏟을 수도 없으니깐 오늘 꼭 하고 싶어.
최 매니저: 그럼, 오늘 앵콜은 2곡만 해.
이게 최선이야.
자훈: 어떻게 앵콜을 그렇게 해.
오늘은 마지막 날이잖아.
최 매니저: 자훈아,
그 콘서트 마지막 날에 이렇게 아프잖아.
머리 아픈 거 보통 일 아니다.
너 없으면 우리 스탭들 다 굶어죽어.
우리는 너랑 하다가 다른 가수랑 일 못해.
자훈: 알았어. 알았어.
대신 앵콜은 어제처럼 3곡만?
최 매니저: (못 이기는 척) 으이구!
더 자.
그렇게 최 매니저와 대화를 주고 받던 자훈은 말을 마치자 안심이 된 듯 다시 잠이 들었다.
홍여사의 붉은 이마와 저승 사관의 새끼 손가락 딱밤의 쾌거였다.
#5
스르륵! 타닥.
밤바다 뷰가 멋진 제주도 호텔의
꽤 좋은 방의 옷장 전신 거울로 꽃분 이모. 홍란 할매, 현수가 걸어나왔다.
꽃분 이모가 든 여행책에는
어느새 객실 카드키까지 꽂혀 있었다.
현수: 이모! 이게 어떻게 된거에요?
꽃분 이모: 현수야~ 내가 말했지? 저승 사서는 저승 사자들의 안식년이라고?
넌 몰랐겠지만 말이야.
우린 언제든지 여행책 한권과 거울만 있으면 전세계 어떤 호텔이든 빈방만 있으면 갈 수 있어.
홍란 할매: 저승 사서는 저승 사자의 일이 힘든 만큼의 보상이기도 해.
하지만 저승 사서가 즐거워야 망자의 기억을 잘 찾아줄 수 있어서 그런 것도 있단다.
꽃분 이모와 홍란 할매가 이야기 하는 동안
현수는 아름다운 제주의 밤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꽃분 이모: 할매, 여기 이 호텔 진짜 좋다!
홍란 할매: 아! 여기가 자훈이가 제주도 콘서트 때문에 판산동 무당촌네들 다 초대한 곳이야.
만월이라 자훈이 콘서트에 못가게 돼서 내가 따로 표시해놓고 깜박했다.
저승사서들이랑 오려구 말이다.
여기가 지금 제주도에서 제일 좋은 호텔일 거야.
현수: 아! 어쩐지.
이모, 할매! 그럼 지금 자훈이랑 우리 할매도 볼 수 있어요?
꽃분 이모: 그건 안돼.
산 사람은 원래라면 이걸 알아서 안된단다.
현수: 아... 그렇네요.
시무룩해하는 현수를 보며 홍한 할매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팥알을 하나 꺼내어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 그 팥알을 현수 손에 쥐어주었다.
홍란 할매: 현수야. 자훈이 못 본지 꽤 됐지?
저기 화장실에 들어가서 자훈이가 있는 방을 생각하면서 이 팥알을 거울로 던지렴.
그러면 마치 티비처럼 보인단다.
다 보고는 티비 끄듯이 손가락으로 거울 표면을 터치하면 원래대로 돌아온단다.
꽃분 이모: 그래. 현수야.
어차피 온김에 제주도 산 야식이랑 회를 시켜서 가지고 올라가야 하니깐.
할매는 나랑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이동해서 제주에서 장이나 보러갑시다.
홍란 할매: 좋지.
우리 걱정말고 한 1시간 정도 걸릴거야.
그렇게 두 여장부가 호텔방에 현수 혼자 덩그러니 남겨놓고 나가버렸다.
현수는 망설이다가 팥알을 던저 자훈의 방을 보았다.
자훈이는 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훈: 귀신, 만월, 기억, 사서.
우리 아니면 거의 모를 것 같은 것만 적어 보냈네?
잘 쓴 정자체 글씨라 현수네 신 할머니가 보낸 건 아닌 거 같고.
발신인은 없네?
...
자훈: 그렇구나.
현수가 그... ‘기억’에 관한 건 말했어?
'뚝!'
놀란 현수가 바로 거울을 터치해버렸다.
현수가 혼잣말을 했다.
'어쩌지?
산 사람은 이런 걸 알면 안된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