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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수 Oct 22. 2022

우선순위

늦다

역설적이게도 노동법은 노동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새로운 노동법이 시행될 때 기업규모에 따라 단계를 나누고, 그 단계마다 시차를 두며 법이 시행되어 온 전례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1단계는 상시 근로자 300명 이상의 기업이 해당되며, 법이 제·개정되고 1년 후에 시행된다. 2단계는 상시 근로자 30명 이상 300명 미만의 기업이 해당되며, 1단계 시행 이후 1년 뒤에 적용된다. 3단계는 상시 근로자 5명 이상 30명 미만의 기업이 해당되고, 2단계 시행 이후 1년 뒤에 적용된다.


기업규모는 대체적으로 3단계로 나뉜다. 물론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과 같이 2단계의 형태도 존재한다. 단계별 기업규모와 시행일의 간격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휴일을 유급으로 보장"(근로기준법 제55조 2항)해야 한다는 법이 적용됐을 때와 주 52시간제가 시행됐을 때의 단계별 기업규모와 시행일의 간격은 달랐다. 노동법이란 것이 국가가 시행하는 제도이므로 국가나 지방 '공'무원, '공'기업 노동자 등은 기업규모와 상관없이 1단계에 속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대개 그 단계에서 완전히 배제되기도 한다.


노동법의 시행이 기업규모별로 시차를 두고 단계화되면, 결국 공무원과 공기업·대기업 위주의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노동법의 수혜를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기업규모별로 노동자를 차별하는 명분은 항상 그럴듯하다. 정부나 국회는 그 이유에 대해, '제·개정되는 노동법을 시행할 만한 조건'을 이미 '1단계에 속하는 기업들'이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설명을 반대로 해석하면 다른 단계에 속한 기업들은 그렇지 못하므로, 새로운 노동법이 적용될 여건을 마련할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처럼 들린다. 제·개정되는 노동법의 대부분은 기업의 비용 부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실 노동법의 존재 이유는 '사용자 개인'과 '노동자 개인'의 관계가 전혀 수평적이지 않다는 점에 있다. 그동안의 노동법은 노동자가 일터에서 누려야 할 자유의 범위를 점차 늘려가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이는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가하는 '노동착취'를 그에 비례해서 억제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노동법이 정말 필요한 곳은 어디일까? 단계에 따라 노동법을 늦게 적용받거나 그 단계적 절차에서 아예 배제된 (중)소규모 사업장의 노동자가 아닐까?


이미 '1단계에 속한 기업들'은 노동법 이상의 제도가 충분히 갖춰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기업이 자체적으로 도입한 '취업규칙'의 형태로든, 노조의 교섭을 통해서 얻어낸 '단체협약'의 형태로든 말이다. 반면에 (중)소기업의 현실상 노동법으로 강제하지 않으면 그 기업들은 그 이상으로 일터의 환경을 향상시키려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노조를 조직하기도 쉽지 않다. 그들에게는 노동법만이 최고의 규범인 셈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정부와 국회는 모든 노동자가 노동법을 평등하게 적용받게 '강제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기업의 부담"만을 주장하며 노동자 간의 차별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는 모양새다. 그야말로 행정 편의주의적 대처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기업규모에 따라 노동법을 차등 적용하는 것은 국가가 '능력주의'를 장려하는 듯 비친다. 국가가 노동자들을 향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제·개정된 노동법을 제일 먼저 적용받고 싶거나, 노동법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조건 지금보다 기업규모가 더 큰 곳으로 가라. 공부를 열심히 하든, 스펙을 많이 쌓든 그건 노동자 본인의 몫이고 책임이다."


시차를 두고 단계적으로 노동법의 적용을 받으면, 그나마 다행일지 모르겠다. 아예 적용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5인 미만의 소기업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노동법의 가장 기초적인 법이라고 할 수 있는 '근로기준법'에서마저 "일부 규정"(근로기준법 제11조 2항)만 적용받는다.


안성의 한 자동차 부품조립 업체에서 최저임금을 받고 일했던 60대 노동자는 매주 한 시간 이상씩 연장근로를 했음에도, 가산수당을 받지 못했다. 투표일은 분명 "빨간 날"임에도 유급휴가를 받지도 못하고 출근했다. 몇 개의 "빨간 날"만 빼고 다 그랬다. 만약 그 "빨간 날"에 쉬려 해도, 다른 노동자들처럼 그냥 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조건 연차휴가를 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급휴가가 됐다. 그녀는 다른 곳의 노동자들도 자신과 같은 대우를 받는 줄 알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만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노동)법만 무조건 만들면 뭐해. 정작 우리(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한테는 도움도 안 되는 걸. 법이 공평해야지."


주 52시간 제도 역시나 5인 미만 사업장에만 '예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주 52시간제의 시행은 신규 채용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은 당장 한 명이라도 더 채용하면 5인 미만 사업장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빼앗길지 모른다. 이러한 사정 탓에 주 52시간제 도입이 전체 사업장으로 전면화되지 못한 것이다. 사용자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이유로 국가가 자발적으로 일부 노동자의 노동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예외적 법 적용' 때문에 5인 이상 사업장이 5인 미만인 듯 행세하는 곳도 만연하다. 하나의 업체를 일부러 두 개로 쪼갠다든가, 일부 노동자의 4대 보험 가입을 임의로 막는다든가의 형태로 불법이 자행된다. 예외는 항상 편법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국가가 어쩌면 불법을 알게 모르게 유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적으로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기업규모에 따라 시차를 두고 적용받거나(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 아예 적용받지 못하도록 막았다(5인 미만 사업장). 전체 산재 사망의 80.9%(작년 기준)가 이 사업장들에서 발생한다. 노동자는 죽음마저도 기업규모에 따라 차별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노동법에서 '개인들의 합'이 적다고, 그 합계 안에 속한 개인의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경우는 이처럼 허다하다. 가장 취약한 노동자에게 가장 먼저 가닿아야 할 노동법이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유를 단 한 가지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이러한 종류의 차별은 사용자가 과도하게 지출할지 모를 비용에 대한 '걱정'이 법을 만든 목적이나 개정해선 안 되는 이유로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노동자가 누려야 할 권리 보장보다 사용자가 치러야 할 비용 지출을 더 걱정하는 사회에서 이런 차별'쯤'은 어쩌면 필연적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그들이 믿을 거라고는 '개인들의 합'으로 차별을 조장하는 노동법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 이 글은 2022년 8월 11일, 『오마이뉴스』에 실렸던 「"노동법 있으면 뭐 하나도움이 안 되는데"」를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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