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스파링
무언가에 집착하는 습관
매일 반복되는 훈련을 하던 중이었다. 뭔가 하나에 꽂히면 그것에 집착하는 성격이 있는데 호주에 있을 땐 달리기를 하는 습관이 그러했고 요즘은 복싱장에 가는 일이 그러했다. 백수가 되었다고 해서 무작정 스스로를 놓아버리면 다시 일어서기까지 더 오랜 힘과 시간이 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아주 작은 추를 스스로에게 달아 놓았다. 사람에게는 조금의 스트레스가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말에 공감하는 쪽이기 때문이다. 아파서 쓰러질 정도가 아니라면 크게 일정이 없는 내 일상에서 '복싱'은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에 습관처럼 해내는 일과가 되었다. 매일 똑같이 스트레칭을 하고 줄넘기를 넘고, 준비 동작들을 하고 몇몇 동작들을 거울 앞에서 꾸준히 연습하다 보니 하루는 관장님께서 고3 친구와 함께 링에 올라 스파링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매일 거울 앞에서 오롯이 내 의지와 싸워 이기는 게 전부였던 나의 복싱 세계가 이 경험 하나로 엄청나게 넓어질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장비를 착용하고 평소 연습하던 글러브가 아닌 조금 더 작고 부드러운 재질의 글러브를 착용했다. 상대 역할을 해 줄 고등학생 친구는 나보다는 훨씬 전문적인 모습으로 글러브와 마우스피스를 끼고 링 위에 올랐다. 그 친구가 할 일은 오롯이 내 주먹을 피하는 역할이었고 나의 역할은 그동안 배운 동작들을 활용해 상대를 가격하는 역할이었다. 매일 거울이나 샌드백 앞에서 자유 의지 없이 움직이는 것들과 싸우다 실제로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누군가와 마주하게 되자 조금은 긴장된 마음이 들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경험
시합용 글러브로 바꿔 끼고 헤드기어를 쓰고 나니 조금은 긴장감이 생겼다. 시합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우리는 글러브로 정중히 인사를 나눈 뒤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종이 울리자 비로소 상대의 눈이 보였다. 링 위에 올라와 있는 상대에 대한 예의는 최선을 다해 3분을 보내는 일. 나는 나름 민첩한 스텝을 내딛으며 쨉을 빠르게 내밀었다. 그동안에 배운 기술들을 써먹기 위해 쉼 없이 움직이며 거친 숨을 내뱉는 나와는 달리 고등학생 친구는 글러브로 나의 공격을 막고 빠르게 공격을 피하며 나의 체력을 소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나는 3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더디 흐르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내 앞에서 주먹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와 틈을 찾아 공격을 해나가야 하는 나 사이에서 시간은 아주 더디 흘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른손잡이 이기에 왼쪽으로 상체를 숙이고 빠져나가 허점을 노리거나 오른쪽 아래로 피한 뒤 옆구리를 공략해야 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연습으로 깨우친 내용이었지만 실전에서 그것을 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격을 하지 못하는 상대였지만 스텝을 밟으며 가드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매일 거울 앞에서 연습하던 동작들을 떠올리며 도망가는 상대의 급소를 치기 위해 노력한다. 글러브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숙이며 밀어붙이는 상대에게 어떤 방향에서 하는 공격이 치명적일지를 순간적으로 파악해 빠르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복싱의 핵심이다. 당장은 공격은커녕 상대를 쫓아가는 일도 힘에 부치던 내 틈새를 관장님의 주문에 맞춰 상대가 작은 힘으로 가격했다. 처음으로 맞은 주먹의 매운맛에 나는 정신을 차리는데 아주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헤드기어를 고쳐 쓰고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쨉과 훅을 날리고 위빙으로 방어를 하는 동안 3분이라는 시간은 아주 더디 흘렀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느린 3분이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분이라는 시간을 쉼 없이 움직이며 링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상대와 겨룬 그 경험은 꽤나 특별한 일이 되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적어도 온 힘을 다해 상대에게 날릴 주먹 한 번을 위해 몇 백 번의 트레이닝이 필요했음을 깨닫게 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첫 스파링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나는 그동안 미뤄왔던 일들을 하나씩 달력에 채워 넣기 시작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스스로의 허들을 뛰어넘은 평범하지만, 조금은 특별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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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일기 @jessie_evenfol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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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철들지 않은 30대.
걷고 마시고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
손으로 써 내려가는 것들은 모두 따뜻한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
그래서 여전히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