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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이해하는 시간들

by Jessie



어린 시절, 나의 기억 속에 아빠는 자주 술에 취한 사람이었다. 늘 가족이 함께 아침과 저녁을 먹던 꽤 다정한 집이었지만 IMF를 기점으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많은 가정의 평화를 무너뜨린 1997년의 높은 고개는 우리 가족도 피해 갈 수 없는 무엇이었다. 아직 새하얗게 어린 시절, 아빠의 회사에 따라가 붉은색 머리 끈을 두르고 투쟁을 하던 아빠들의 모습은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단지 투쟁을 투쟁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 그 시절 노조원 아저씨들은 가족들이 모두 회사를 방문해 투쟁 현장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회사 마당에 크게 설치되어있던 아빠가 작업하는 곳의 사진들, 빨간 머리띠와 조끼를 입고 부당함을 향해 고함지르는 어떤 가장의 모습 같은 것들을 가족들도 함께 보고 느끼며 아빠의 생존권을 지킬 수 있도록 응원하는 시간이었다. 마지막엔 아이들이 무대로 올라가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는 시간이 주어졌고 아이들은 그 대가로 모두 스케치북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낡은 땀냄새가 배어 있던 조끼를 입은 아빠의 손을 잡고.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따뜻하고도 슬픈 투쟁의 현장이었다.


그 따스한 투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누군가의 배신으로 회사 팀장에서 팀원으로 강등되는 아픔을 겪었다.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한 사람이었다면 아빠가 그 늪에서 벗어나 삶의 다른 곳에서 의미를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빠는 슬프게도 그런 사람이 되지 못했다. 자주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 다른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어떤 날은 경찰의 전화를 받고 동생이 아빠를 데리러 가기도 했고, 대게는 술에 잔뜩 취해 핸드폰과 지갑을 몇 번씩 잃어버리며 아파트 화단이나 현관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술이 취해서야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비겁한 사람이라고 늘 아빠를 치부해 버렸다. 잠든 우리를 깨워서 늘 맨 정신일 때는 하지 못한 이야기를 몇 번이고 꺼내며 소리를 질러대곤 했으니까. 내가 대들던 날은 꼭 뺨에 불이 나곤 했다. 멀쩡하지 않은 아빠를 바라보는 일이 괴로워서 눈을 치켜뜨며 아빠나 잘하라는 서툰 충고를 했다. 1997년의 일을 2024년이 될 때까지 꺼내고 또 꺼내며 눈물과 콧물을 한결같이 흘리던 사람이 나에게는 아빠였다.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때론 지워버리고 싶은 존재. 그래서 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집을 떠나 제주도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집에 찾아오는 일이 쉽지 않도록. 그래서 가족을 보러 가지 않아도 적당한 이유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나의 바람처럼 오랫동안 집을 떠나 지냈다. 역마살은 아빠에서부터 비롯되어다고 해도 반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해외에서 오래 떠돌며 갑갑하고 고요한 시골살이를 오래 외면하고 지냈다. 서울에서 일을 하다가도 아빠 이름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 경찰이 나에게 아빠를 데리고 가라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술에 취한 아빠는 그렇게 아주 멀리서도 나의 발목을 잡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그리워서 임신을 하고 고향에 돌아갔지만 술을 마시면 변해버리는 아빠와의 다툼은 피할 수 없는 무엇이었고 할머니댁에서 배가 불러가는 동안 꼬박 지내야 했다. 산티아고를 걷고 돌아와서도 여전히 미움을 털어내지 못한 내 자신이 바보 같아서, 또 끊임없이 함께 살기를 권하는 남편의 부탁으로 이젠 한국에서의 모든 미련들을 정리하고 베트남으로 어렵사리 넘어왔다. 그렇게 돌아와 세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아빠의 위암 소식을 받아 들었다. 그렇게 술을 마시니 병이 나지 않겠냐며 한숨을 쉬는 나에게, 엄마는 말했다. 수술을 끝내고 나와 마취가 채 깨지도 않았는데 엄마 손을 잡으며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거듭 말하는 아빠를 보며 지난 마음들을 온전히 용서했다는 이야기였다. 오랜 시간 동안 아빠의 술주정을 들으며 오히려 고생한 것은 엄마였을텐데 오랫동안 듣고 싶었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그 모든 미움을 내려놓았다는 덤덤한 속내에 입이 말랐다.


여전히 초록색 소주병을 보면 아빠가 생각난다. 미워하는 사람은 더 닮는다는 말처럼 네 잎클로버를 잘 찾는 것도, 작은 물건 하나도 잘 버리지 못하는 것도, 술을 좋아하는 것도 나는 아빠를 닮았다. 참 신기한 것은 그렇게 미워하던 아빠를 나 대신 아이가 구김 없이 좋아해 준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빠에게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을 아이가 자그맣게 모아 사랑한다는 말로 전해준다. 아빠는 아이에게 매일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고 말한다. 때로 그 사랑한다는 말은 나에게 오는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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