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곳들로 가는 지도
5년 동안 머물렀던 호주에서, 내가 가장 애정을 가지고 했던 일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의 아르바이트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손님을 꼽으라면, 나는 늘 그녀를 떠올린다. 흰머리가 멋스럽고 천천히 건네는 말이 늘 따뜻한 할머니. 그녀의 이름은 팸(Pam)이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은 빠짐없이 가게를 찾는 단골이었다. 초콜릿칩 쿠키도우 3통, 쿠키앤크림 3통, 그린티 1통, 스트로베리 치즈케이크 1통. 그녀는 늘 똑같은 주문을 했다. 손님이 많지 않은 낮 시간, 손님이 드문 시간대에 전화를 주고 포장된 아이스크림을 찾아가는 배려있는 손님이었다.
어느 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이스크림을 무척 좋아하시나 봐요?”
그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아이스크림은 본인이 아닌, 딸을 위한 것이었다. 팸의 딸은 젊은 시절 거식과 폭식을 반복하는 섭식장애를 앓았다. 오랜 병 끝에 그녀는 햇빛 알레르기까지 얻고 방 안에만 머무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커튼을 치고 10년 가까이 방 안에서만 살아온 딸에게, 세상과 유일하게 연결되는 끈은 아이스크림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날 이후, 포장된 아이스크림 뚜껑에 짧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제가 살던 곳이 아닌 다른 곳의 삶을 동경하며, 지구 반대편으로 홀로 날아왔답니다. 이곳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워요. 당신도 언젠가는, 이 풍경 속으로 나올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 아이스크림이 당신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딸에게서 직접적인 답장이 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팸은 종종 딸의 근황을 들려주거나, 편지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하기도 했다. 짧은 대화가 조금씩 길어지는 동안,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위해 또 어쩌면 나 자신을 위해 계속 편지를 썼다. 기대하고, 기다리고, 안부를 궁금해하던 여섯 달.
호주를 떠나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할 준비를 하던 어느 날, 팸이 나를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딸도, 가족들도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그러나 약속 당일, 팸의 아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잠시 아래로 내려와 주실 수 있나요?”
그는 아무 말없이 내 이름이 적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여동생이.. 좋지 않은 선택을 했어요.
식사에 초대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이건, 그녀가 마지막으로 부탁한 선물이에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상자 안에는 삐뚤빼뚤한 한글로 써 내려간 편지와 따뜻함이 묻어있는 노래 가사들 그리고 작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얼굴 한 번 마주하지 못한 나에게 마지막 선물을 남기고 햇살 속으로 사라졌다.
어떤 기대는 슬프게 머문다. 우리는 결국 만나지 못했지만 나는 믿고 싶다. 아이스크림 뚜껑 위에 적은 문장들이 그녀의 마음 어딘가에 닿았으리라고. 나는 그녀를 위해 편지를 썼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에게 건네는 용기이기도 했다. 기대는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기대는 기다림이고, 기다림은 다정함이며, 그 모든 마음의 끝에는 결국 사랑이 있다.
나는 그렇게 호주를 떠나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다. 그리고 매일, 그녀가 남긴 짧은 문장을 꺼내어 읽었다. 하루 중 일부를 떼어내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친구의 안녕을 조용히 바라고 또 바랐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