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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는 외계인 Aug 07. 2024

케어러 예찬

살짝 과장하면, 반 송장 상태로 멜번으로 유입되었다.

주변 사람들은 철밥통인 공무원, 그 중에서도 교사란 직업을 “과감하게” 그만두고 멜번으로 이민 온 나를 별나게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과감”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탈출했을 뿐이다. 교사란 직업을 수행하면서 건강을 심하게 잃었다.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었다. 0교시 수업과 야간 수업과 자율학습이 전국에 전염병처럼 퍼져 있던 시절에 교사를 시작해서 노동이 나의 건강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7시경 출근하고 밤 10시쯤 퇴근이 일상화된 시절이었다.


아마 한국에 눌러 살았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한국에서 일하다 가는 “죽을 거” 같아서 이민 온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아, 나만 별종이 아니란 이 연대감이라니. 


다시 나의 시간과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게 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냥 숨을 붙들고 사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벅찼다. 호주의 청정한 자연과 여유롭고 느슨한 사회 문화가 나를 치유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게으르고, 느려터지고, 더 나아가 무능해 보이기까지 하는 호주의 시스템과 문화가 나를 다시 일터로 나갈 힘을 주었다. 감지덕지한 맘으로 산다. 이미 또래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몸을 지닌 건강약자의 입장에선, 지구상에 호주같이 느리게 돌아가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물론 대부분의 한국 이민자들을 미치게 하는 것도 이 느림이긴 하다. 어차피 인생은 상대적이고 자기 기준에 맞춰 판단하기 나름이라면, 호주의 속도는 나에게 최적화된 속도다.


케어러란 직업을 예찬한다. 

세상에 이보다 나에게 더 잘 맞는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돌봄 노동을 시작하기 전에 내 주된 일과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혼자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일이었다. 이 낙도 일 이년 지나니 싫증이 났다. 인간이 이유 없이 사회적 동물이라 불리는 게 아니란 걸 깊이 깨닫는 시간이었다. 


                                                             고객과 함께 카푸치노 한잔




“할머니, 커피 드실래요, 아님 핫초콜렛 드실래요?” 


이젠 혼자가 아니라 고객과 카페에 간다. 내 가장 오래 된 단골 고객 L은 78세 할머니이시다. 일주일에 두            번씩 단골 카페에 모시고 가서 점심 식사를 지원하는 게 내 역할이다. 할머니는 내가 집에 들어서기만 하면 두 팔을 벌려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는 이렇게 환대하신다. 


“Oh, my friend!” 


지원을 못 간 다음 날엔 어김없이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I missed you so much!” 


아이처럼 순수하신 어르신이 진심으로 쏟아내는 환대가 나를 따뜻하게 한다. 한국에 수많은 가족을 남겨두고 타국에서 타인, 그것도 고객에게 이런 환대를 받을 줄이야.  


“할머니, 두나 커버(Doona cover)가 뭐예요?” 


84세 할머니 고객 D. 그녀는 유독 침대 정리에 까다롭다. 침대 시트와 커버가 정확하게 각도와 방향이 맞아야 하고, 사방에서 팽팽하게 당겨져서 주름 없이 쫘악 펴져야 한다. 마치 호텔 식 침대처럼.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다음 주에 어김없이 기억하곤 웃으며 주의를 주신다. 


"내가 일주일 동안 밤마다 너를 저주 했잖아. 잠자리가 불편해서."


낙상 후 간단한 팔 수술을 하셔서 침대 정리를 할 수 없는 독거노인 그녀는 말은 공포스럽게 하시지만, 결국 나 없이는 침대보 하나 교체하지 못하시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분이다.


D 에게서는 호주 로컬들의 생생한 집안 문화를 배운다. 호주 로컬들의 집안 문화는 직접 들어가 보지 않으면 속살을알기 어렵다. 그들이 아침으로 무엇을 어떻게 먹고, 침실을 어떻게 관리하고, 도대체 이들이 말하는 포리지(porridge)는 뭐고,샤워할 때 한국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생 자체가 호기심 덩어리인 나, 이 일을 하면서 저절로 답을 알게 되었다. 고로 호주 이민 생활에 자신감이 커진다. 


“오늘은 크리미 치킨 파스타 만들 거야.” 


44세 시각을 거의 상실한 지적 장애인 B. 난 그가 냄비 가득 치킨 파스타를 만드는 일을 곁에서 지원한다. 세상에 내가 젤 좋아하는 일이 요리인데, 누군가의 요리를 도와주고 돈을 받는 직업이라니. 이보다 신나는 일이 어디 있을까? 거기다 그는 묻는다. 


“다음엔 보체(Bocce) 클럽 갈 때 너의 지원 시간이 맞으면 같이 갈래?” 


B는 장애인 보체 선수다. 호주의 다른 주에 가서 받아온 메달을 보여주는 그의 눈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기회가 되면 언젠가 B와 함께 보체 클럽에 가고 싶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경기를 실제로 보게 되는 날이 올 지 누가 알겠나? 


케어러란 직업의 매력을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장점이라면, 정해진 근무 시간 외의 책임과 책무와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일 게다. 세 시간 지원이라면, 딱 세시간만 바짝 집중해서 일하고 나면 끝이다. 지원을 위해 딱히 준비할 것도 없다. 내 몸이 자원이고 내 몸이 도구이다.  

누군가는 의아해 한다. 교사하다가 어떻게 이 일을 하냐고. 나는 반문한다.

"죽는 거 보단 살아서 일하는 게 좋지 않아요?"

백세 인생에서 반 정도 살았다. 호주가 아니었으면 이미 사망하여 잿가루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삶이었다. 어차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한국에 살았어도 교사란 직업을 유지하기 힘든 몸 상태였다. 호주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나에게 "제 2의 삶"을 선물했다. 제 2의 고향, 제 2의 노동,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죽어가다 회생한 말 그대로 제 2의 인생.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한국에서의 교사와 호주에서의 케어러란 직업을 비교해 달라면 난 일초의 망설임없이 답한다. 


“난 멜번의 케어러가 더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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