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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브리데이미 Oct 15. 2019

노브라는 살아가기 힘든 나라

#정상의 기준이 바뀌어야 할 때

 주말에 친구를 만났는데 애가 브라를 안 하고 나왔다. 패치를 붙이고 헐렁한 옷을 입어서 티는 안 났는데 친구의 “되게 편해”라는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사람 많은 장소에서 브라를 안 하면 불편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몸은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면 심리적인 불편함이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나는 친구가 불편해하지 않는 불편함까지 대신 불편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런 내가 촌스러워 주위를 둘러보는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쩌다 이렇게 됐냐 하면, 어릴 때부터 하도 정신교육을 받고 자라서 그렇다. 흰 티를 입을 때면 꼭 나시티를 덧입어서 브래지어의 존재를 가려야 한다는 교육을 학교 가정 시간의 선생님에게도 받고, 언니들에게도 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단속’이었다.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다니던 여고생 때, 한 번은 앞 줄에 앉아 있던 애가 나시티를 안 입고 왔다. 브래지어 후크를 채우는 등의 끈이 얇은 블라우스 위로 그대로 드러났다. 아이들은 세상에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수군거렸다.    


 쟤, 끈 다 보여


 그때,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개념 없는 애 취급을 했던 걸까. 여자의 가슴을 보정하는 속옷일 뿐이었는데. 당시 우리는 남의 몸을 들여다보면서 속옷을 입으라 마라 비난하는 시선 자체가 더 무례하다는 걸 모를 만큼 이 사회의 문법에 길들여져 있었다. 내가 사는 세상은 여자의 몸을 가리키는 상징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사회가 ‘문란’해질 수 있으며 너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협박하는 분위기였고, 이를 빌미로 타인의 속옷에 참견하고 경고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나는 자라면서 한 번도 “너의 몸은 남자를 자극하는 유혹거리가 될 수 있어. 잘 가리고 다녀. 남 부끄럽지 않게.”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들어본 적은 없다. 그러나 간접적인 언어로는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런 말들은 오히려 점잖은, 규율과 예절이라는 단어로 둔갑해서 들려왔다.     


 며칠 전, 여섯 살짜리 여자애를 키우는 엄마와 유치원 이야기를 나누다 희한한 소리를 듣게 됐다. 유치원 원장님이 ‘예절교육’에 유독 엄격해서 여자아이들에게 꼭 속바지를 입히라고 당부했다는 이야기였다. 이유는 ‘남자애들의 정신이 산란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데 분노랄까. 화가 치밀었다. 아직도 이 사회는 여섯 살짜리 어린애한테까지 자기 몸을 일단 가리고 봐야 할 무엇으로 인식시키고 있구나, 예전이랑 달라진 게 없구나… 무기력한 분노가 허탈하게 치밀었다.   




  열일곱 살 때였다. 비가 오는 줄 모르고 우산을 안 챙기고 왔다가 옷이 젖어 버렸다. 여름이라 베이지색 모시 블라우스에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속이 비쳐 나시티가 드러났다. 집에 가려면 인적이 드문 재개발 아파트 단지를 지나야 했다. 공사가 진행되는 중이라 거주민은 모두 나간 상태였고 여기저기 시멘트 덩어리와 부속 자재가 쌓여 있었다.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보는 아저씨였다. 50대 중반에서 후반의 나이. 번들거리는 눈빛이 기분 좋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애, 너 용돈 벌지 않을래?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단박에 알아들었다. 엄청난 공포가 몰려왔다. 주위에는 지나가는 행인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낮이지만 텅 빈 아파트 단지의 한가운데에 갇힌 셈이었다. 거대한 시멘트 건물에 가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공간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그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서운 와중에도 화가 났으나 대거리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걸음을 빨리해 도망가는 것뿐이었다. 물웅덩이에 샌들이 빠져 질척거렸고 자갈에 배여 피가 났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남자는 도망치는 나를 천천히 따라왔다. 꼭 독 안에 든 쥐를 바라보는 것처럼 히죽거리는 표정이 소름 끼치게 엉겨 붙었다. 허겁지겁 정신없는 나와 달리 그의 발걸음은 산책이라도 하듯 여유로웠다. 101동, 102동, 103동... 아파트 단지가 끝이 나고 큰 대로변이 나왔는데도 따라오더니 둑길을 올라가 완전히 탁 트인 대교로 올라서자 그제야 자취를 감추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집까지 걸어갈 수가 없었다. 더 이상 홀딱 젖은 상태로 사람들 눈에 뜨이고 싶지 않았지만 지갑에는 마침 돈도 없었다. 집 근처에 사는 친구에게 연락을 해 와 달라고 부탁했다. 친구는 대교 위에서 전화하는 내 목소리를 듣고 내가 자살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다며 놀라서 달려왔다. 같이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데, 자꾸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 오는 날 이런 옷을 입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인적이 드문 곳을 혼자서 지나는 게 아니었는데...    


 머리로는 모든 잘못이 남자에게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했던 행동을 곱씹어 보며 반성했다.  여름에는 얇은 옷을 입기 마련이고, 비 오는 날은 기상청도 예측하기 힘든 법이므로 비 오는 날 옷이 젖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끊임없는 공사와 좁은 골목길, 밀폐된 공간으로 구성된 서울에서 인적 드문 길을 혼자 걷는 상황은 없을 수가 없는데. 나는 나를 탓했다.  '처신을 잘해야 한다'라는 말에 담겨 있던, 여성의 몸을 사건의 '빌미'로 보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한 대학교에서 성추행과 성폭력이 발생하자 '잠재적 피해자'인 여학생들에게 밤 10시 이후로 외출을 자제하는 예방조치가 내려진 사례가 있었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여자들은 “성추행과 성폭력의 잠재적 가해자인 남자들이 밤 10시 이후에 외출하지 말 것을 예방조치로 넣어달라"고 항의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왜 폭력의 가해자에 대한 예방조치는 소극적이면서 피해자의 '처신’만 강조하는 걸까. 왜 가해자의 위협 때문에 여성들의 밤 외출 권리가 침해당해야 하는 걸까.    


 밤 외출을 삼가거나 속바지를 입는 건 개인의 문제다.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밤 외출을 삼가거나 가정에서 아이에게 속바지를 입히는 걸 뭐라 할 수는 없지만 학교와 유치원이라는 공공기관에서 규칙처럼 정해버리는 건 엄연한 권리 침해다. 여자애들에게 속바지를 입히는 걸 규칙으로 삼으려면 그만큼 남자애들에게도 합당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유치원 측에서 남자애들에게 따로 성교육을 시킨다든가 하는, 여자애들이 속바지를 입으며 감내하는 불편만큼(팬티를 두 장 껴입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답답하고 자궁건강에도 좋지 않다), 양성평등 차원에서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유치원 때부터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 사회에서 자란 나는 브라를 하는 상태가 ‘정상’이라고 믿어왔고, 노브라를 하고 당당히 사진을 올리는 설리를 보면서 그녀의 행동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내가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방식을 거스르는 이탈자에 대해서 기존의 입장에 서 있는 자가 가질법한 그 오래된 시선으로 재단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노브라를 한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고 싶어서 올렸다고 몰아가기도 했다. 마치 노브라가 누군가를 유혹하는 몸짓이라는 듯이, 사진으로 찍히면 안 될 만큼 대단한 이슈라도 된다는 듯이. 그녀의 행동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정서와 안 맞은 것은 사실이나. 문제는 노브라를 한 그녀가 아니라 노브라를 문제로 인식하고 그 부분에만 관심을 보이는 왜곡된 시선이 더 문제였다는 것을, 그녀가 떠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의 댓글 중에 이런 글을 봤다. ‘설리가 살 수 있는 나라가 행복한 나라’ 일 거라고. 기존 질서에서 조금 어긋났다고 해서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아니라. 그냥 내버려 두는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미국이나 캐나다나 유럽에서처럼. 여자들이 몸에 달라붙는 나시티를 입고 노브라여도 아무도 힐끔거리지 않고 힐끔거리는 사람이 더 이상해지는 나라 말이다.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새로운 ‘학습’이 필요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브래지어를 가리기 위해 학습받다 보니 어느덧 가리는 상태가 자연스럽게 되었듯이. 지금부터라도 노브라를 그냥 내버려 두는 ‘정신교육’을 받다 보면 여자가 브라를 하든 안 하든 그걸 일탈이나 유혹이나 무질서로 왜곡하는 일은 점차 줄어들 것이다. 지금 당장 ‘나 보기에 불편하니 하지 마’라고 하는 건 결국 현 상태를 고착시킬 뿐이다. 우리도 처음에는 브라 차는 게 꽤 불편했는데 차다 보니 당연한 게 되어버렸다. 이제는 거꾸로 노브라에 적응할 차례다. 괜찮다. 처음에만 불편하지 익숙해지다 보면 다 자연스러워지게 되어 있다.     


 이제, '정상'의 기준을 바꾸어야 할 때다.        


 *이 글은 남자들을 겨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노브라에 민감한 건 여자들도 마찬가지거든요. 여자와 남자, 제 자신을 포함한 우리 사회 모두를 향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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