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지난 회사를 그만둔 건 후회가 안 되는데, 이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이직 한지 보름쯤 된 후배가 말했다. 꽤 높은 연봉을 제안받고 남들이 가고 싶어 하는 회사에 시니어 마케터로 일하고 있다. 무슨 일인지 물었다.
"윗분이 실패를 너무 두려워해요. 그래서 그래서 저희보고 마케팅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이디어를 내도 계속 성공할 수 있느냐를 묻는데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죠?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후배가 다녔던 이전 회사의 마케팅 규모는 상당했다. 글로벌 아이돌 스타가 그 회사의 메인 모델이었으니 그 이외의 것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스케일이 큰 규모의 마케팅을 하던 그녀가 지금은 아이디어만 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생각이 많은 CMO 덕분이다.
이 상황이 꼭 후배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우린 직상생활 속에서 의외로 상사와의 관계가 아주 편하진 않다. 관계가 좋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 어떠한 태도로 권위를 대면해야 할까? 저마다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로 단순하다. 어떠한 스타일의 권위든지 그 사람을 인정하고 그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다. 쓰고 보니 말은 쉽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까지 수많은 내적 갈등과 싸워야 함을 알고 있다.
나도 좋은 권위를 만나는 게 바람이었던 적이 있다. 상사가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기 때문이다. 실력이 있고 없고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롭고, 현명한 지도자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다. 내가 그런 권위가 되는 것도 그러한 권위를 만나는 것도 참 축복이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의 모든 권위가 이상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 만남의 축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세월이 갈수록 더 깨달아지기에 간절할 뿐이다.
과거에 나는 권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부족했다. 그들의 결정과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권위에 대한 나의 이해와 관계없이 그들의 결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위치와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린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한다. 그때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간다. 위장이 심장의 역할을 할 수 없듯이 상사는 상사로, 중간 관리자는 중간 관리자로, 신입은 신입으로서의 역할이 있다. 그 역할에 충실하고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선을 넘을 때 흐름은 깨진다. 둘째, 그 위치에서만 알 수 있고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 위치에 가면 나는 더 잘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 않다. 가보면 안다. 꼭 그렇지 않은 상황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셋째, 우린 언젠가 리더가 된다. 좋든 싫든 그 자리에 가게 된다. 그때가 됐을 때, 지금의 모든 경험과 깨달음이 훌륭한 리더의 밑거름이 된다. 그 자리에 가면, 부족한 것이 참 많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좀 더 온전한 리더가 되도록 하는 훈련이 될 것이다.
물론 권위는 권한을 행사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문제는 결정에 대해 책임을 떠넘기는 권위들을 종종 본다.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너 탓'이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기저에 그러한 마인드가 있을 때, 심사숙고하지 않고 사람을 평가한다. 누군가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면,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이 있다. 이 포지션의 역할이 옳게 설정이 된 것인지, 혹시 성과를 내지 못할 환경적 상황은 없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상황 불문하고 성과를 내라고 주문을 한다면, 그 회사에서 나와도 괜찮다.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고, 해결해야 할 환경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위도 사람이다. 그래서 실수와 실패를 한다. 이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나는 권위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그래서 실망을 했던 것 같다. 윗사람도 나와 같은 시절을 거쳐 누군가와 협업하고 도움을 받아 지금의 자리에 온 사람임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권위 아래 있는 사람 또한 현명해야 한다. 권위의 결정과 태도를 존중하되, 모든 순간에 현명하고 분별력 있게 대처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알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나 또한 지혜롭지 못했다.
세상에서 우린 다양한 권위를 마주하게 된다. 다시는 마주치지 않고 싶거나, 오랫동안 내 곁에 두고 싶거나, 혹은 가끔씩 만나면 괜찮거나 그 누구든지 상관없다. 권위는 권위다. 나도 그 권위가 되는 시기가 오고, 그때가 되면 또 어떤 아랫사람에게 마음이 가는 지도 알게 된다. 그래서 위치에 맞는 태도, 행동, 언어를 알아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 조직이 원만하게 운행된다.
Dear J
J, 권위로 인해 많이 힘들어했던 너를 보았어. 권위는 신이 아니란다. 너도 그 위치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생각보다 많은 무게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 물론 근본적으로 악한 윗사람도 있단다. 그건 권위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사람의 인격이 문제란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아니, 어떻게 이 사람은 이 위치까지 오른 거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거야. 그런데 그런 생각은 너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을 거야.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 속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가 있을 거란다. 어떠한 상황에서 문제가 있을 때, 주변의 문제점을 바라보며 탓보다 내가 얼마나 지혜롭게 대응할지를 먼저 생각할 때, 문제가 쉽게 풀리기도 해. 그걸 잊지 않기를 바란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나는 네가 앞으로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인정받는 윗사람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