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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수 Aug 29. 2019

비운 자리에 채워진 것들

정신의 미니멀리즘

인스타그램을 지운지 꽤 오래 되었다.

정방형의 액자에 예쁜 구석만 골라담아 그럴싸하게 포장해 올리는데에 꽤나 열을 올리곤 했는데 요즘엔 사진 어플에 손이 가지도 않고 사진첩을 열어도 공들인 컷이 없다.



심미적인 것에 목숨 걸던 시절엔 일상의 가장 사소한 것이라도 마음에 들어야 성에 찼다. 어차피 적게 가지고 있을 물건 이미 가지고 있는 것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했고 그 물건들이 나를 정의내린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미니멀리즘이라는게 어떤 면으로는 유물론적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없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 있음을 드러낸다. 비움은 채움이 있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무색이건 라탄 소재건 미니멀리즘을 표방하는 디자인이건. 그 모든것은 어쩌면 인스타그램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좋은 이념조차 금세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니까.



물질에 대해 초연해졌다고 해서 텅 빈 방에 요를 깔고 잔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더이상 작은 물건에 소란을 떨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전에는 “(생김새가) 80%정도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사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봉했는데 이제는 그런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냥 제 기능을 하면 충분하다.



요즘 간소하게 살기 위해 해나가고 있는 것을 사진이 아닌 글로 기록하자면 다음과 같다.



“콘센트에 지저분하게 꽂혀있는 전선들이 싫었다. 전기밥솥을 압력솥으로 대체하는 것 만으로도 큰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커피포트를 휘파람 소리가 나는 주전자로 바꿨다.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수납장에 모두 보관한다. 원래 사용하던 렌지대는 작은 카페로 바뀌었다. 네스프레소 기계가 내 것이었다면 가차없이 처분하고 핸드드립 방식으로 바꾸었을텐데 남편의 행복이므로 남편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줬다. 전기밥솥을 없애는 것만으로도 주방은 놀라울만큼 가벼워진다. 그리고 덤으로 압력솥의 윤기나는 밥도 먹을 수 있다. 텅 비워진 주방의 공간에서 불을 켜두고 밤에 밑반찬을 미리 만들어둔다. 손끝에 닿는 재료의 느낌이 좋다. 그 곳은 마늘향으로 가득 채워진다.”


주방일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요즘 하는 일이 주로 집안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내 일상은 굉장히 단순하다. 글을 쓰지 않은지 오래 되었고 생각을 멈춘지도 오래 되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에 깊이를 잃었다. 사진, 글 그리고 말. 빈 자리를 채운 것은 노동이다. 베이킹소다를 여기저기 뿌리고 행주로 닦아내고 또 닦아낸다. 몇번이나 물을 뿌리고 또 완전히 건조해야하고 그 과정에서 내 손도 몇번이나 젖었다가 건조해지는 것을 반복한다. 침대 옆에는 어려운 책이 아닌 요리책만 있다.



매일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똑같은 밥상을 준비한다. 미리 우려낸 육수에 미소된장을 풀어 된장국을 만들고 마른 반찬을 차리고 서툰 솜씨로 계란말이를 만든다. 식사가 끝나갈 때 즈음 아몬드 우유, 바나나 그리고 신선초를 넣어 갈아만든 스무디를 지민과 나눠 마시고 학교에 가는 지민에게 인사한다. 오전의 시간 대부분은 묵상을 하며 보내고 점심을 먹은 후 집안일을 한다. 집안일이 어느정도 끝나면 필라테스를 하러 가고 돌아오는 길에 그 날 먹을 만큼의 장을 봐서 온다. 손이 느려 집에 오자마자 저녁을 준비하다보면 금방 지민이가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온다. 함께 저녁을 먹는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하다. 그러고 나면 저녁 시간은 금세 지나간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매일의 할 일을 써서 지워나간다. 요새는 하루를 빈틈없이 쓰는 덕분인지 계획한 모든 것을 지운 채 잠에 든다.



어릴 때 내 이름을 잃고 싶지 않다는 다짐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집안일에 대해 거부감이 컸다. 집안일을 하게 되면 바깥 생활을 잃은 채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로 머문 삶을 살다 죽을까봐 두려웠다. 집안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며 매너리즘에 빠져 보람도 즐거움도 없어 우울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그 두려움이 더 커지곤 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약간 도를 닦는 기분이다. 지난 날들을 머리만 쓰면서 살다보니 마음과 머리 모두 지쳐 고장나버린 것 같았는데 단순 노동을 반복하다보면 그 모든 잡념들이 깨끗하게 비워져버린다. 쓸데 없는 생각들과 불안한 시간들이 머물렀던 자리엔 단순함이 자리한다. 남편은 언제나 생글생글 웃고 나도 딱히 스트레스가 없어서 생글생글 웃고 있다. 요리와 집안일로 언제나 손이 바쁘다보니 자연스레 핸드폰에도 손이 덜 가게 된다. 나태함으로 보내던 건강하지 않은 현대인의 시간이 근면한 노동으로 채워졌고 고뇌로 가득찬 무거운 머리가 가볍고 경쾌해졌다.



물질의 비움과 채움이 아닌 추상적이고 정신적인 비움과 채움을 경험하고 있다. 허공에 떠다니는 시간, 잔뜩 경직되고 긴장되어 있는 정신,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늘 다른 시간을 헤매이느라 지금을 온전히 고마워할 줄 모르는 마음을 비워낸 자리엔 쉼 마저 정성스럽고 온전하게 보내는 충만한 하루로 채워졌다.



정신적인 것은 그런 것 같다. 그렇게 비워진 자리에 끊임없이 좋은 것들로 채워지고 따뜻한 것, 웃음, 행복 그리고 사랑이 짙은 시간들로 채워지는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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