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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의 미도리 Nov 19. 2023

미움 또한 사랑하고 싶다

 세숫대야에 세수를 하겠다고 물을 받아놓고 잠깐 급한 일이 있어 나간 새에 물이 슬슬 차가워진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보니 벌써 겨울이 지나 있다. 이미 그 물로 세수를 할 수도 없다. 빛바랜 세숫대야는 덩그러니 놓여 있고, 난 그 위로 비친 나의 긴 얼굴을 바라본다. 내가 잊고 나온 세숫대야의 차가운 물이 내 몸 안 발가락에서부터 채워져 있어 무척 시리다. 눈물샘도 막혀버려 나의 어딘가에서 도무지 이 차가운 물을 빼낼 수가 없다.

 언제부턴가 하루를 마치고 석양의 전망대 위에서 나를 내다보았을 때 더 이상 희망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마음 같은 건 생각나지 않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한가운데가 도려져 아무것도 느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에 대한 희망을 살해당하고 난 뒤에 더 이상 알록달록한 단어들이 생각나지 않는 걸까.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유리 조각들이 있다. 내 혈관 안에서 긴 시간 표류하다 결국 동화되지 못하고 피부를 뚫고 안에 박힌다. 밤과 고요가 흩뿌려질 때면 나의 피부 속에서 살살 움직이며 상처 난 부위를 다시 할퀸다. 내가 겪은 수많은 습도와 추위는 아직 나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틋하다, 각자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삶의 태가. 날이 추워지고 차갑고 비릿한 겨울 공기가 내 폐 안에 들어온다. 나뭇가지가 얼어가는 와중에도 삶에 대한 의지가 느껴지는 그 모습들이 따뜻하다. 나의 미움 또한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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