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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열매 Sep 16. 2023

당신의 동료는 안녕한가요


언제부턴가 마냥 어른(?)을 탓할 수 없는 나이가 됐음을 느낍니다. 어딘가 잘못됐다고 느꼈을 때 그 잘못에 나의 책임은 하나도 없는 것일까 묻게 되면,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수 없는 나이가 된거죠. 


서울특별시의회에서 ‘서울특별시 사회적경제 정책 및 지원 사업의 재편을 위한 성과 분석’이라는 연구용역을 냈습니다(연구 용역은 9월 13일 마감됐습니다). 연구의 주된 목적은 서울시 사회적경제 정책과 사업의 성과를 세부사업 단위로 분석해 이를 통해 조례를 제·개정하는 등 향후 입법 방향을 제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과업 내용 중 하나로 조례간 통폐합 가능성에 대한 검토도 들어가 있습니다. 


서울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범위로 사회적경제 관련 사업에 일정 부분 참여해 온 사람 중 한 명이기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고 말이죠. 사회적경제 그 자체에 좀 더 집중하고 몰두했어야 했다는 반성을 뒤늦게 할 뿐입니다. 반성과 함께 스물두 번째 오늘의논문을 시작해봅니다. 




요 몇 달 사이 주변의 이직이 잦았습니다. ‘일’을 하기 위해 만난 동료지만, 매 순간 함께 머무는 공간에서 크고 작은 무수한 소통을 거치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의지하고 기대게 됩니다. 평생(?)을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헤어짐은 익숙해질 수 없는 일입니다. 떠나는 이유야 사람마다 각기 다를 테니 함부로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하지만 함께 일해 온 사람으로 안타까움과 상실감을 느끼는 동시에 어떤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가 함께 더 잘 해나갈 순 없었을까요. ‘만약’이란 말을 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만약에...’라는 가정을 해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함께 계속 일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일이란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의 목표를 세우고, 목표에 맞춰 계획을 짜고, 솔루션이 타당한지 동료들과 의논하고 또 그 과정을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으며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가고요. 일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소통하며 자기 몫의 역할과 책임을 지고, 그 결과에도 당당할 수 있는 것. 그런 일을 할 수 있기를 꿈꾸지 않으시나요? 


사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일과 관계된 타인과의 관계는 물론 나 자신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자기 일에 자부심을 지닌 사람으로 일하며, 그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해서 그것이 결국 한 사람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삶을 은연중에 기대합니다. 삶의 반은 어쩌면 일하는 나로 보낼 텐데 말이죠. 그렇다면 내 일의 의미를 찾고, 또 의미 있는 일이니 더 잘하고 싶은 거죠. 특히 ‘사회적 가치’를 고민하는 우리는 내 위치와 역할에 부합하는 최소한 일인분의 일을 충분히, 거뜬히 해내길 기대합니다. 


일의 의미야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인공 지능의 시대, 인생의 의미>란 책에선 의미란 항상 개인적이므로 보편적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좀 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의미는 지극히 주관적이지 객관적인 범주가 아니다. 내 인생의 의미는 나의 바깥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자기만의 특별한 인생의 의미를 고백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많은 것들 중에서 고르고 해석하기도 한다. 의미는 항상 개인적이므로 보편적일 수 없다.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의미 부여의 유일한 결정권자는 개인이다. 진화와 우주는 결정권자가 될 수 없다. 인간처럼 개방적인 존재, 혹은 니체의 말처럼 <확정되지 않은 동물>은 목적과 목표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 진화적으로 미리 정해진 목적(초지능의 생산)과 목표(우주로의 팽창)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최적화>가 아니라 만족한 삶이다. 합리성, 효율성, 진보는 생물학적 자연법칙이 아니고,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 존엄성, 정의, 자유 같은 가치와 비교하면 당연히 하위에 그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중심에 서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일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계신가요? 동료들과 일의 의미를 단단히 다져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계신가요?




일터와 삶터에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만을 잔뜩 품고 있어요. 하지만 솔직히 저 자신과 대면하기엔 겁이 납니다. 어딘가 울퉁불퉁한 상태거든요. 그래서 매일 붙잡고 있던 SNS를 잠시 멈춰뒀어요. 저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정돈하고 싶었거든요.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생각을 정리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지역과 청년, 그리고 탈-활동: 청년 활동가 정체성의 균열과 문화정치적 재구성'이란 논문입니다. 논문은 '지역'에서 활동의 '이탈' 또는 '이동'을 경험한 청년 활동가들의 사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탈, 이동, 소진, 종료가 청년 활동가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정리합니다. 


어느 한 부분을 가위로 오려내듯 가져오기 힘든 글입니다. 일에 대한 기대와 열망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러한 '활동'을 '운동'이란 용어로 치환할 순 없습니다. 노동과 활동이 생활에 중첩된 구조는 개인의 정체화 과정과도 연결됩니다. 활동에서 벗어났지만, 그 경험과 기대는 삶의 태도가 됩니다. "활동하지 않았다면 내가 평생 몰랐을 그것들"을 계속 이어가는 거죠. 지역, 청년, 활동에서 비롯된 이야기와 그 의미를 더듬거리며 읽다 보니 결국은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안팎의 변화가 큰 요즘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유동하는 시간 속에 사람들과 여러 힘의 작용을 주고받으며 존재합니다. 나와 타인이 얽혀 있는 지금이건만 각자가 바쁘게 지내느라 우리가 무슨 일을 겪고 있고 무엇을 성취하고 또 잃어가고 있는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혹은 어디로 가는지 질문을 던질 겨를이 없습니다. 답이 없는 질문이니까요. 단편적 사건에 그때그때 반응하며 빨리 잊고 맙니다. 시대의 큰 흐름을 읽고 생각하려는 노력을 더는 기울이기 힘든 것일까요? 그 노력을 어떻게 가져갈 수 있을까요? 다양한 질문과 고민을 안심하고 나눌 수 있는 유무형의 공간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개인이 자신의 활동과 행위에서 느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요. 욕심을 내면 사회적경제 섹터가 그런 공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위로를 받는 경우가 있어요. 박용택 선수가 학생 선수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괜히 울컥했습니다. 회복탄력성이라는 것은 결국 잘 먹고 잘 자고 좋은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정리하고 해내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 충실히 쌓여가는 일상에서 비롯되는 거겠구나 싶어요. 


홀로 무언가 견디고 계신 분들에게 조용한 위로와 응원을 전해봅니다. '버텨낸'  또 '버티고' 있는 우리를 응원합니다. 





2022년 8월부터 격주로 발행 중인 <오늘의 논문> 뉴스레터의 내용을 다시 싣고 있습니다. 구독은 아래 링크에서 가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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