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좀 창피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사실 나는 "부모"라는 단어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도 고등학생이 된 첫째 아이가 마음이 아파서 아주 힘들어 하던 그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나는 부모가 되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부모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과연 부모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하고, 좋은 부모란 무엇이며 또는 나쁜 부모는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들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없고 따로 공부를 해 본 적도 없었다. 한마디로 빵점에 가까운 부모였다.
장손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 나는 어릴 적부터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혼자 다 가지면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유년기에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고 그래서 마음속에 억울한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나와 내 동생에게 베풀면서 살아오셨다. 긴 시간 동안 할아버지를 대신해 대가족의 가장 역할을 했어야 했기에 아마도 다른 가족들(고모 그리고 삼촌들)까지 돌보면서 나와 동생을 키워야 했으니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어린 기억 속에 아버지는 내가 스무아홉 살에 결혼해서 분가하기 전까지 한 번도 그런 것들을 내색하지 않으셨다.
실질적으로 나의 부모님과 같은 지붕아래에서 함께 산 것은 딱 중학교 때까지 만이었다. 그 이후로는 매일 얼굴을 보고 지내는 시절은 없었다. 고등학교를 올라가면서 시골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와 떨어진 삶의 시작이었다. 그런 단절된 환경에서도 아버지는 늘 최선을 다하셨고 철이 없었던 나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나 요구했고 아버지는 늘 챙겨 주셨고 나는 또 그것들을 늘 거부감 없이 받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부모들은 늘 이렇게 자식들을 위해 계시고, 그리고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시는 분들이구나라고 말이다. 한 번도 그 생각에 의심을 해 본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심지어는 결혼을 하고 신혼기간 동안에도 조차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부모님은 늘 그 자리에 똑같이 있을 것이며 나의 든든한 백이 될 것이고 그저 나는 나의 삶을 살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행복하게 아무 탈 없이 살아주는 것으로 당신들에 대해 충분히 보답을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두 아이가 태어나고 나도 “부모”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아빠가 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잠도 설치고 우는 애기 달래려고 안고 업고 기저귀 갈아 주고 안아 주고 피곤해도 주말에 같이 놀아주는 시간을 보내면서 문득문득 그때서야 나의 부모님들도 나를 키우면서 이렇게 힘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손주를 낳아서 보여줬으니 나는 마치 나의 부모에게 큰 효도를 했다고 나 자신을 위로했고 그때 까지도 여전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로만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본 것이고 아주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후회하거나 질문을 던져 보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만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던 내가 부모라는 두 글자의 의미를 심각하게 고민을 해 보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다. 첫째 딸의 심각한 사춘기. 첫째 아이는 어릴 적부터 성격이 내성적이라 아내도 나도 신경을 꽤나 많이 쓰긴 했지만 결국엔 다른 아이보다 더 사춘기를 심하게 했고 그것이 다 끝나는데 무려 꼬박 3년이 걸렸다. 그 긴 3년 동안 나는 그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겪어야만 했고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해 내야 했었다. 좀 억울했지만 내가 낳은 자식이라는 진실 앞에서 나의 책임감은 큰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으며 그 긴 시간 동안 (적어도 나에게는 아주 길게 느껴졌다) 아픈 일들이 많았고 내 마음에 생채기도 생기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 딸보다 오히려 나를 키워주신 나의 부모님 생각이 더 났고 나는 과연 나의 부모님에게 어떤 아들이었을까 그리고 나의 부모님도 나의 딸로 인해 마음 아팠던 것처럼 내가 당신들을 많이 아프게 하지는 않았나 라는 생각을 참 많이도 했던 것 같다.
첫째 딸의 그 긴 어둠의 터널은 다행히 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났다. 그런데 그런 것도 전염병인지 그 뒤에 둘째 딸도 비슷한 경험를 했고 그녀의 그것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첫째 아이를 통해 내가 경험하고 알게 된 것들이 둘째 딸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던 나의 믿음은 산산조각 깨졌고 지금 나는 다시 새로운 또 다른 어둡고 지루한 터널을 지나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긴 시간을 지나면서 부모라는 단어에 대한 많은 생각과 반성을 하게 되었다.
첫째 딸과 오랜 시간 동안 힘든 과정을 보내면서 아내와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또 생각했던 것들은 둘째 아이와는 이런 것들을 절대로 반복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참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전생에 내가 잘못한 일을 참 많이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렇게 다짐을 하고 조심을 하고 또 준비도 했지만 둘째 딸도 결국은 첫째 아이와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 힘들어하는 두 아이들을 통해 나는 부모로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 많은 경험들로 인해 때로는 슬퍼하기도 했고, 너무 힘들면 울기도 했고, 딴 사람이 되어 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감정적 그리고 이성적 부모 역할의 선을 왔다 갔다 넘기를 수 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하였다. 그러면서 그전에 몰랐던 “부모의 마음”들을 노트에 조금씩 정리할 수 있었다. 내가 노트에 따로 기록을 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나중에 내 아이들과 공유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나를 키워주신 내 부모님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누구나 태어나서 부모는 처음 해 본다. 그 역할을 잘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못할 수도 있다. 부모도 결국은 사람이고 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못하는 것들도 많다. 부모는 어쩌면 자식 앞에서 평생 약자이다. 자식은 늘 "갑"이며 부모는 늘 "을"이다. 이 모든 것들을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고 그래서 부끄럽다. 죄송스럽다 나의 부모님에게.
그래서 이 글은 책 제목처럼 나의 때늦은 반성문이다. 나의 부모님에게 쓰는 아주 늦은 반성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