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
누군가 나에게 그랬다. 부모는 자식에게 영원한 ‘을’ 같은 존재다라고 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자식은 늘 갑의 위치에 있고 부모는 을의 위치에서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자면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 을이 되어 버린 부모는 자식인 갑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뜻한 사랑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어려울 때는 경제적인 지원, 문제가 생기면 고민 상담, 실패하면 동기부여, 방황할 때는 참고 기다리기, 수다가 떨고 싶을 때는 이야기 들어주기, 그리고 학교 다닐 때는 과제 도움 등등 지금 당장 노트를 펴고 그것들을 나열해 보면 한 페이지는 족히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들 하나하나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 어느 것도 쉬운 것이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참고 기다리기’인 것 같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인내심 말이다.
인내심의 사전적인 의미는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마음이다. 자식들이 성장하는 그 과정에는 참 많은 일들이 생긴다. 꼭 좋은 일들만 일어나지는 않는 법. 괴롭고 힘든 일들이 더 많이 일어 난다. 힘든 일이 생길 경우 대부분의 자식들은 친한 친구나 가족 구성원 또는 부모에게 의지하는데 모두가 자기편을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적어도 부모는 자기편에서 자기를 지지해 주기를 원하곤 한다. 어떤 경우는 힘든 일들이 이해가 되고 오히려 응원을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때로는 아무리 내 자식 일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들이 이해가 안 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편에서 그들을 이해해 주어야 하는 조금은 억울한 경우가 많이 생긴다. 그래도 그런 것들을 내색할 수는 없다. 자식은 부모가 자신들과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싸움이 되고 그 싸움의 결과는 항상 정해져 있다. 부모는 늘 패자이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늘 을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지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부모가 참고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부모가 인내심을 가지고 자식을 대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부모로서 자식에 관한 인내심은 끝이 없다. 시작만 있을 뿐. 쉽게 말하자면 평생을 참고, 참고 또 참고 끝까지 참아야 하는 정말로 끝없는 인내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사람이다. 한 번을 참는 것도 힘들 때도 많은데 어떻게 끝없이 참고 또 참을 수 있나 말이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는 말이다. 인내심이 정말 어려운 부모의 덕목인 두 번째 이유는 인내심이 꾸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자식들에게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잘 참았다가 그다음 날에는 무너지고 다시 참고 또 무너지는 롤러코스트 같은 인내심은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적어도 내가 두 딸들을 키우면서 경험한 것으로 말하자면 말이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보여줘야 할 인내심은 사실 단순히 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기다림을 동반해야 한다. 그래서 어쩌면 더 힘들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는 더 나은 인격으로 자라겠지 또는 언젠가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 때가 오겠지 또는 언젠가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겠지 또는 언젠가는 변하겠지. 그 기다림의 시간이 짧으면 좋겠지만 때로는 길고 긴 시간을 참으며 기다려야만 하는 경우도 종종 많다. 아무리 길어도 그 시간이 물리적으로 딱 정해져 있다면야 그다지 힘든 것은 아닐 수 있지만 제일 최악의 시나리오는 참고 기다림의 시간에 끝이 안 보이는 경우이다.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은 전쟁같이. 비록 지금은 밉고 이해가 안 되지만 언젠가는 달라지겠지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또는 언젠가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라는 희망의 회로를 하루에도 몇 번씩 돌리고 돌리면서 참는 것은 너무나 힘들 과정일 뿐만 아니라 어치 보면 참 가혹한 것이라 생각이 든다.
부모는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자식들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자신들의 부모에게 반드시 효도를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나는 효도를 잘하는 자식들이 참 대단한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두 딸들을 보면서 느낀 것이 사춘기 자아를 찾아가는 청소년들은 이런 것들을 너무나 빨리 배운다. 그래서 부모에게 기대고 온갖 것들을 요구한다. 그 모든 것들에 응답할 수 있는 그런 슈퍼맨 같은 부모를 원하는 것 같다. 자식들에게 부모는 어쩌면 마지막 백업이며 늘 언제나 힘들면 기댈 수 있는 어깨이기 때문에 무언의 명령으로 “제발 기다려줘. 좀만 참고 기다려줘”라는 메시지를 계속 던지는 것 같다. 부모가 더 이상 자신들을 기다려 주지 못할 것 같은 것을 눈치채면 더 자극적인 말과 행동으로 부모들을 괴롭힌다 그리고 결국 이것들은 부모들에게 극한의 인내심을 요구하게 만든다. 이런 인내심을 놓아 버리거나 아니면 잃어버리는 순간 대부분의 자식들은 부모와 멀어지고 만다. 물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거리도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한번 멀어진 간극을 다시 좁히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자식 문제인데 참는 게 무슨 대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참는다는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은 그것을 어떻게 컨트롤하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있지만 독이 될 수 도 있다. 잘못되면 이것이 화병이나 큰 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물며 그것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적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된 행동이나 말에 대해서 적당한 응대를 하거나 정말로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화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가 나의 자식일 경우는 그렇게 대중의 잣대를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적마다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인내하면서 감정적인 컨트롤을 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사춘기 시절에 나는 짜증을 참 많이 부린 기억이 난다. 공부가 잘 안 돼서 또는 운동에서 지고 나면 또는 아파서 아니면 밥 맛있게 먹고 소화가 안 된다고 짜증을 부린 적도 많았다. 그럴 적마다 내 기억에 어머니는 늘 그냥 말이 없으셨다. 그저 나만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행동으로 표현을 했다. 아버지는 늘 외출이 잦아서 이런 나의 행동을 아시지 못했고 내가 고3병을 무척이나 심하게 했던 그해 처음으로 나 때문에 마음이 힘드셨을 테고 그해 내내 인내심으로 나를 기다려 주셨던 것 같다. 당시 나는 모의고사 성적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고 대학 입시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로 자주 아버지 앞에서 짜증을 부리고 나약한 모습을 보였고 때로는 울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신 아버지의 마음은 칼로 후비는 듯한 인내의 고통이지 않았을까.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위해 당신이 해 줄 수는 있는 거라고는 그저 따뜻한 밥 한 끼 사주면서 옆에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공부를 대신해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개인 과외를 직접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아마도 스스로를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아버지는 나에게 말로는 수 없는 위로를 해 주셨지만 그런 말로 듣는 위로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의 둘째 딸이 마음의 병으로 힘들어하는 과정에 막상 내가 부모라는 입장에서 놓여 보니 아주 오래전에 내가 고3일 때의 일들이 자연스럽게 기억이 났고 그때서야 비로소 나의 부모님 나의 아버지가 어떤 마음이었겠다는 생각에 참 미안했다. 내가 고3 당시에 난 한 번도 아버지에게 “괜찮아, 걱정 마”라는 위로의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다. 그저 나는 힘들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에 내가 그때 그런 말들을 아버지에게 해 줬더라면 적어도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 중간에서 조금은 마음이 가벼웠을 텐데 라는 뒤늦은 후회를 해 본 적이 있었다. 솔직히 나도 둘째 딸이 나에게 위로를 해 줄 거라는 기대를 전혀 안 한다. 나의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어쩌면 나도 둘째 녀석의 짜증과 차가운 말들을 받고 듣고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하나 싶다.
하지만 정말 이런 무제한 적인 맹목적인 인내심이 정말 자식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부모도 그때그때마다 감정 표현을 하고 무작정 참지만 말고 화도 내고 지적도 하고 응대를 하는 것이 나은 것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제한적인 인내심은 결국 사람을 쓰러지게 한다. 더 나아가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미워도 살아 있는 부모가 더 낳지 이 세상에 없는 부모는 자식들에게 더 큰 상처만 주는 것이라. 그냥 묵묵히 자식들을 마음 아파하면서 기다리기보다는 이제는 감정 표현도 하면서 갑과 을이 아니라 인격 대 인격의 관계로 살아가보려고 할 테다.
주말에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 카톡으로 영상통화를 했다. 팔순이 지난 아버지는 아직도 나의 목소리와 얼굴만 봐도 안다. 나의 마음을. 그러면서 늘 말씀하신다. "부모 되기 힘들지? 원래 그런 거야. 너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랬어....." 어쩌면 아버지는 아직도 나 때문에 저렇게 가슴 아파하시고 여전히 참고 기다리시는 건지도 모른다. 이제 팔순이 넘어서 다 내려놓고 사셔야 할 연세이신데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는 뒤늦은 반성을 했다. 이제는 그 기다림을 멈추게 해 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야 얼마 남지 않은 당신들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