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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M Oct 06. 2024

이해하게 만들었다

방송에서 유명인이 말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봐요"라고.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은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선을 한 줄로 옆으로 쭉 긋듯이 간단하지 않고 지그재그 모양처럼 많은 감정들이 오르막을 갔다가 내리막을 달리다가 또는 멈추었다가 뒤로도 가고 앞으로도 가는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아마도 유명한 정신과 의사들이 높은 상담비를 받고 일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랑은 전혀 관계가 없었던 사람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가까이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겠나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반대라고 본다. 내가 잘 알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이해하는 프로세스에 몇 가지 특별한 재료가 추가로 필요하다. 바로 불공정한 편들기와 무한 반복이다. 이것들의 자세한 내용은 뒤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겠다. 


자식을 낳아 부모가 되는 순간부터 부모에게는 이해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이 생긴다.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유아기 때는 물론이고 폭풍우 같은 사춘기를 지날 때는 최고점을 찍고 그 후로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고 나서도 부모가 이해해야만 하는 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나는 아직 내 자녀들이 결혼해서 완전히 독립하지는 않았지만 내 주위를 돌아보면 자녀들이 출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모들이 자식들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한다. 그러고 보면 아마도 끝이 없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와 자식은 늘 일방통행이다. 이해하려는 것은 늘 부모의 의지가 더 강하다. 이렇듯 어떤 일에 있어서 자식들을 이해하려는 부모의 마음은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자식들의 태어남이 그들의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동등한 선에서 출발할 수 없는 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고 본다. 평생을 부모는 “을”이고 자식은 “갑”이다.


나도 내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늘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많이 쏟아부은 편이다. 특히 사춘기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것들을 나의 지식이나 감정이 아니라 그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해 보려고 참 많이도 생각해 보고 노력을 아까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내 자식들은 힘들 때면 늘 아내보다 나를 먼저 찾곤 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너무 과도하거나 무리한 이해는 오히려 자식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다. 


과연 “이해한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은 어떤 것의 맥락(context) 찾아서 그 상황(situation)에 맞는 판단(decision)하고 상대방에게 충고(advice) 해주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시작과 끝은 끊임없는 대화(conversation)이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정의일 뿐이고 다른 분들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 자녀들을 이해하려고 많은 대화를 시도하고 하지만 문제의 맥락과 자녀들이 놓인 상황은 알지만 판단을 못하고 충고도 제공하지 못하면 결국 “아빠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다. 물론 들어주는 것 자체 만으로도 자식들에게 위로를 주고 그 순간을 이겨낼 수 있는 평온함을 줄 수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현명한 판단과 충고를 주지 못하게 되는 경우 그 결론이 좋지 못했다. 제일 힘든 것은 그렇게 온 정성을 다해 이해해 주었지만 자녀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잘못된 행동을 반복하거나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경우이다. 


앞서 내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불공정한 편들기 그리고 무한 반복. 지금부터는 이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만약 내가 다니는 회사의 동료가 힘든 일이 생겨서 그를 이해해 본다고 하자. 아마도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같이 먹으면서 동료의 고충을 들어주고 그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가능하다면 충고도 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대부분 일회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즉 그 동료를 위해 무한 반복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행동과 말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의 살붙이라고 할 수 있는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 구성원을 (아내 또는 자녀) 이해해야 할 때는 무한 반복이 필요하다. 중간에 포기를 하면 안 된다. 포기를 하는 순간 그전까지 쏟아부었던 노력과 쌓아 왔던 신뢰가 한꺼번에 무너져 버린다. 내가 둘째 아이로 인해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끝까지 계속해서 자신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를 원한다. 중간에 포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더 이상한 행동을 통해 부모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하지만 나도 부모이기 이전에 사람인지라 자식을 이해하기 위해 반복되는 대화와 설득을 하다 보면 어떤 경우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솔직히 말하면 포기라고 하기보다는 좀 지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두 번째로 불공정한 편들기.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고민거리를 말할 때 내심 부모가 자기편을 들어주기를 원한다. 가령 친구들과 싸워서 힘들거나 뭔가 생각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경우 객관적으로는 내 자식이 잘못한 것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편이 되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아니 아주 많다. 만약 그런 경우 내가 너무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을 기준으로 그들을 이해하려고 하면 바로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더 이상 소통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녀들은 결국 마지막까지 믿었던 백이 허무하게 자기들을 배신했다는 그런 생각으로 말이다. 이건 자녀들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내는 내가 늘 자신의 편에 서기를 원한다.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말이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와 크게 충돌한 적이 있었다. 결혼에 관해서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공무원을 하셨고 장손에 말 그대로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그래서 늘 내 결혼에 대해서는 당신이 생각하는 며느리와 내가 결혼하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좀 달랐다. 사실 결혼이라는 문제를 얘기하기 전까지는 내가 그렇게 아버지와 부딪치거나 의견 충돌이 생긴 적이 없었다. 뭐든 아버지의 결정을 따르는 편이었고 그리고 나도 그것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고 늘 믿고 의지하곤 했다. 결국은 결혼은 내가 원하는 대로 했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 나는 처음으로 충돌을 했고 아마도 아버지의 이해가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 후로도 많은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내 의견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았으며 아버지는 별다른 반대 없이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인정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한결같은 말이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이런 말을 자주 하곤 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아버지 맘은 어떨까 라는 생각을 깊이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사에 내가 생각했던 이해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지금의 내가 내 아이들을 일방적으로 이해해 주는 것처럼. 


무엇이든 일방적인 소통은 어느 한쪽이 상처를 받게 된다. 짝사랑도 그래서 그렇고 부모가 자식을 이해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내가 부모가 되어서 내 자식을 이해하려고 하면서 이제야 내 아버지가 그리고 내 어머니가 예전에 나를 이해해 주시면서 속상한 일이 많았을 텐데 나는 한 번도 그런 마음들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뒤늦은 반성을 했었다. 어쩌면 누군가를 100%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 대상이 나의 피붙이인 자녀들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특히 부모로서 자식들을 이해하는 것은 수많은 희생과 감정의 상처를 동반해서 힘들고 그것이 더 힘든 이유는 끝없는 반복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의 부모님을 내가 이해하려고 한다. 팔순이 지난 두 분들에게 내가 요즘에 자주 하는 말이 “아버지가 좋으면 저도 좋아요. 아버지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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