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다. 나의 부모님은 슬하에 아들만 둘이다. 베이비붐 세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자식이 적은 편에 속한다. 예전에 지나가는 얘기로는 어머니가 하도 딸을 가지고 싶어서 시도를 했다가 그만 중간에 유산을 하시는 바람에 결국 포기하셨다고 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더더욱 남아 선호 사상이 있어서 첫째도 그리고 둘째도 아들을 낳았으니 그래서 시부모님에게 잔소리는 안 들었을 것 같은데 어머니는 왜 그렇게 셋째를 딸로 가지고 싶었던 것일까 궁금했다. 아직도 그 대답은 어머니한테 정확히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아 키워 보니 대충은 그 마음을 조그맣게는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늘 내가 동생보다 먼저였다. 내가 그런 것들을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 6학년 그쯤이었던 것 같다. 명절날 새 옷을 사줄 때도 맛있는 걸 먹을 때도 좋은 것들은 늘 내가 우선이었다. 동생은 가끔씩 내가 입다가 작아진 옷을 입을 때도 있었고 학용품도 내가 새로 사면 기존에 사용하던 것들을 넘기곤 했다. 가끔 동생이랑 다투거나 싸우면 이유를 막론하고 동생을 먼저 나무라곤 했다. 아무튼 착한 내 동생은 한 번도 그런 것들에 대해서 불만을 내색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동생이 그런 것들 때문에 화를 내거나 불만을 표현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고등학교를 올라가면서 동생과 나는 고향집을 떠나 1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에 있는 학교 근처 자취방에서 유학을 했다. 처음에는 나 혼자 하숙을 하다가 내가 고3으로 올라가면서 동생이 합류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부모님께서 자그마한 자취방을 얻어서 할머니에게 우리 둘을 맡기셨다. 내가 고3병을 심하게 하면서 할머니가 걱정을 참 많이 하셨다. 어떻게 하면 나를 편하게 해 줄까 늘 걱정하시고 챙기시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생은 또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자취집에서 먹는 반찬부터 도시락 등등 할머니께서는 모든 것들을 내 위주로 하셨다. 그래도 동생은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착했다. 1년 뒤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게 되면서 할머니께서는 동생만 보살피게 되었고 2년 뒤에 동생도 대학을 들어가게 되었는데 동생은 고등학교가 있는 지방 대학을 가면서 대학을 갔어도 계속 할머니와 같이 한동안 살았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면서 동생이 좀 달라졌다. 조금씩 자신의 불만과 의견을 부모님에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모님의 불평등에 대한 불만들을 말했다. 나는 주로 내 의견을 속으로 두고 표현을 잘하지 않은 편이었는데 동생은 일찍부터 부모님께 의사 표현을 잘했다. 동생이 불만을 얘기할 때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을 했지만 동생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 포기하고 실망하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했다. 나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나로 인해 생긴 상처인 듯해서 속상했다.
나와 동생은 사실 그리 썩 친하지 못했다. 핑계일 수 도 있지만 친할 시간이 없이 서로가 빨리 성장해 버렸다. 학생 때는 서로가 공부하기 바빴고 대학으로 가서 좀 여유가 생기긴 했지만 서로가 물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사는 바람에 속마음을 공유하고 깊은 대화를 할 기회가 없었다. 가끔씩 고향에 내려가서 만나면 서먹서먹했고 어떤 때는 남같이 멀리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 흔한 소주 대적도 한번 못해본 것 같다. 늘 내게 불만이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끝까지 늘 나를 항상 우선적으로 대하시고 주시고 하셨다. 내가 졸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까지 해서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동생보다는 나를 더 많이 챙기셨고 동생은 그런 부모님의 모습에 어느 듯 포기한 듯 보였으며 그럴수록 점점 나와의 거리가 더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부모님이 동생에게 전혀 베풀지 않고 챙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동생과 나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추지 못하고 균형이 안 잡히는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분명히 부모님 성격상 최선을 다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서 내가 결혼을 하고 두 아이들의 부모가 되었다. 나의 부모님과는 반대로 딸만 둘을 낳고 지금껏 길러왔다. 내 아이들도 나와 내 동생처럼 2살 터울로 태어났다. 이상한 것은 내가 두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서 아이들을 길러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첫째 아이에게 더 관심을 가지게 되더라. 그렇다고 둘째 아이를 아예 내팽개치고 무관심하게 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내 동생과의 일들이 유년시절이 있었고 나의 부모님의 첫째 사랑으로 동생이 힘든 것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기에 가능한 첫째 딸과 둘째 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무던 애를 많이 쓰고 조심을 하였다.
하지만 순간순간을 돌이켜 기억해 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우리 부모님이 하셨던 것처럼 첫째 녀석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준 게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정말 이유가 없이 그랬나 아니면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었나. 딱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첫째는 인정이 많고 더 따뜻하다. 물론 종이 한 장 차이 일 수 도 있겠지만 그 미미한 차이로 인해서 내 마음이 첫째 녀석에게 좀 더 다가간 것일 수 도 있겠다 싶었다. 우리 부모님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첫째 딸이 몇 해 전에 참 힘든 시간을 지날 때 내 마음이 정말 많이 아팠다. 사실 그 당시에는 둘째 아이가 하나도 안 보일 정도로 아마도 내가 100% 첫째 녀석에게 매달리고 집중했던 적이었던 것 같다. 그때 당시 내 모습을 만약 우리 둘째 딸이 심각하게 봤다고 하면 아마도 자기는 아빠에게 버려진 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그때는 나의 밸런스가 와르르 무너져 버렸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첫째 녀석은 그 힘든 시기를 잘 헤쳐 나갔고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빛을 본 듯 큰 슬픔과 기쁨의 경험을 하고 나도 그리고 첫째 녀석도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을 때 드디어 나를 쳐다보고 있는 둘째 딸이 보였다. 나는 균형을 다시 찾아가기 시작했고 둘째 녀석에게 따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때 속으로는 둘째 녀석에 “미안해. 외로웠지?”라는 사과의 말을 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 기간 동안 둘째 아이는 불평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물어볼 작정이다.
둘째 딸은 어려서부터 첫째 녀석과는 다른 구석들이 많았다. 둘이 서로 관심 있는 부분들도 달랐으며 서로 장점과 단점도 달랐다. 둘째 딸도 내 동생처럼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딱히 표현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가끔씩 “아빠 괜찮아. 상관없어.”라고 쿨하게 대답하는 것들이 나를 가끔은 놀라게 했다. 그런데 성장을 하면서 둘째 딸이 자기 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언니의 장점을 닮고 싶어서 노력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시간이 지나 사춘기에 들어가면서 둘째 딸도 첫째 아이와 비슷하게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결국 나중에는 둘째 녀석의 시간이 첫째 녀석보다 몇 배는 더 힘든 것들이었다. 첫째 녀석과 힘든 시기를 같이 보냈던 나는 제발 둘째 아이에게는 이런 일들이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기도를 하고 애원하고 했지만 결국은 그렇지 못했고 감기 바이러스처럼 비슷한 병이 둘째 녀석에게도 옮겨졌고 비슷한 터널로 던져졌다. 그 터널은 더욱더 길고 어둡고 추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부모로서 또 그 길을 동행했어야 했고 중간중간 나의 멘털도 무너졌다 일어서고를 반복했다.
사람은 역시 힘들거나 어려울 때 자기의 진심이나 내면을 드러내곤 한다. 그때까지 부모님의 불평등함에 대해서 불만을 한 번도 안 하던 둘째 녀석이 그 힘든 시간들을 지나면서 내가 지칠 때마다 내 마음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곤 했다. “아빠, 나 너무 신경 쓰지 마. 아빠는 언니 더 좋아하잖아. 언니랑 있으면 기분 좋잖아 그러니까 언니한테 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턱 하니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름 첫째 아이와 둘째 녀석 사이에서 사랑의 밸런스를 줄려고 무척이나 노력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결국엔 나만의 생각이었고 정녕 아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라는 자책으로 기분이 너무 속상하고 힘들었다. 이런 말을 듣고 그 어떤 응답을 해도 둘째 녀석은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이 이제 소용없다는 듯이 그저 돌아서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곤 했다. 나에게는 상처였고 아픔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아팠다.
작년에 아버지 팔순을 맞이해서 고국방문을 하고 오랜만에 동생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름 준비한 것들도 다 잘 됐고 아버지도 흡족한 듯해서 기분이 좋았고 동생도 좋아 보였다. 그런데 마지막날 동생이 또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고 평소에 표현하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표정이 더 어두워지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내가 둘째 딸들로부터 받은 비슷한 상처를 받으셨고 아팠을 것이 분명하다. 그 어떤 그 누구의 위로도 치유할 수 없는 아픔이다. 내가 그랬고 아버지도 그랬다.
호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아버지의 그 어두운 표정들이 눈에 계속 밟혔다. 내가 동생에게 좀 더 따뜻하게 잘해주지 못해서 그 불만이 다 아버지에게 간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하고 죄송했다. 속으로 참 많은 반성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생도 나도 이제는 더 이상 사춘기 아이들이 아니고 둘 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인데 왜 그 마음을 모를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속상하고 아쉬웠다.
아버지도 사람인지라 어쩌면 균형을 잠깐잠깐 잃어버리곤 할 수도 있다. 그것이 나 때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너무 멀리 살아서 그래서 자주 얼굴 보기 힘드니까 가까이 사는 동생보다 나를 더 챙기는 것일 수 도 있겠다 싶었다. 시드니로 돌아오고 나서 한동안 기분이 참 많이 다운되어 있었다. 눈치를 챈 아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서 자꾸 물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지만 결국엔 자세한 내용을 얘기해 주었다. 다 듣고 나서 아내는 그건 당신의 잘못도 도련님의 잘못도 아버지의 잘못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저 부모님이 자꾸 늙어지시고 그로 인해 균형감각이 점점 더 느슨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해줬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만약 나의 어머니가 셋째를 가지시고 무사히 순산을 하시고 나에게 동생이 한 면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당신들의 자식이 둘이던 셋이던 열이던 상관없이 다 사랑한다. 열손가락 중에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던가. 모두 다 아프다. 내가 자식을 낳아서 키워보니 알겠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