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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봐도 좋은 사람들

by BM

2008년 3월.


한국은 겨울이었지만 시드니는 여름의 끝자락에 있었다. 지금처럼.


처음 시드니에 오고 첫 직장을 잡아서 본격적으로 호주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6월 정도가 되었어야 겨우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정리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부쳤던 짐도 찾아서 정리가 되었고 아이들이 매일매일 학교와 유치원을 다녔으며 나도 아침마다 출근을 했다. 장소만 서울에서 시드니로 바뀌었을 뿐 평상시 루틴 그대로였다.


그쯤 되고 나니 나도 한시름 놓고 긴장이 풀렸으며 조금씩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낯선 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슬슬 동족(?) 들을 찾기 시작하였다. 한국인들 모임, 한국 교회, 그리고 아이들 학교 한국 부모들. 그런 것들까지 다 형성되고 나니까 우리 가족도 더 이상 혼자 동떨어진 무인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하나로 소속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슷한 시기와 이유로 시드니로 온 사람들과의 교류는 나의 결정에 대한 정당성을 더 확실하게 해 주었으며 좀 더 안정되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쯤에 내가 하는 일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2008년 당시에 한국에서 IT업종에 종사하다가 이민을 온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지금처럼 스마트 폰을 사용해서 언제 어디서든지 인터넷에 접속 가능한 시기도 아니었으며 카톡 단톡방이 있었던 시기도 아니어서 수소문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시드니에 거주하는 교민들의 홍보 장소로 사용되던 포털이 있기는 했지만 주로 광고 위주였고 유용한 정보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네이버 카페가 유일한 곳이었다. 어느 날 퇴근 후에 노트북을 켜고 카페 검색을 시도했는데 한 카페를 발견했다. 회원수도 10명인가 정도 되는 아주 작은 카페인데 시드니에서 IT 전공하는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을 위한 온라인 모임이었다. 우연히도 조만간 오프라인에서 모임을 한다고 해서 회원가입을 했다.


5-6명 정도 모였던 기억이 난다. 첫인상은 참 조촐한 모임이구나라는 것이었다. 그날은 카페 주인이 호주에서 취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그렇다 보니 참석자들 대부분이 취준생들이었고 이미 직장을 다니고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카페 주인이 다였다.


한 30분 정도 발표를 마치고 간단한 다과를 했다. 준비된 음료수와 스낵을 먹으면서 각자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고 대화를 시작했다. 역시 내가 예상한 대로 다들 아직 취업을 준비 중인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더군다나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전공이 나랑은 전혀 다른 네트크워 분야였다. 그래서 나의 이력은 그들에게 특별히 도움이 되지도 못했다.


모임이 끝나고 참석자들이 다 가고 나서 카페 주인과 따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나보다 먼저 시드니에 이민을 와서 이런저런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지금은 호주 회사에서 네트워크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 회사는 내가 잘 아는 회사였다. 자신이 걸어온 과정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그런 것들을 비슷하게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공유하고 싶어서 네이버 카페를 열었다고 했다. 좋은 의도가 느껴졌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카페를 좀 더 키우고 싶다는 의지를 얘기했다. 같이 할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나에게 부탁했다.


나도 쉽지 않은 과정을 통해 호주에서 취업을 했었기에 충분히 공유하고 싶은 스토리가 많았다. 그리고 마침 이런 모임을 찾고 있기도 했으며 살짝은 지루해질 수 있는 호주에서의 생활에 재미를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하자고 요청을 수락했다.




그 이후로 카페 주인과 나는 참 많은 사람들을 카페로 불렀다. 오프 라인 모임도 자주 했다. 주로 이력서를 어떻게 잘 쓸 수 있는지 그리고 영어 인터뷰를 통과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술 등등을 공유하는 세미나를 많이 했다. 모임에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절실한 사람들이 많았다. 빨리 취업을 해서 가족을 돌봐야 하는 사람들 혹은 대학 졸업을 했는데 취업을 못해서 전전긍긍하던 졸업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운이 좋았던 것은 2008년 후반부터 호주 정부가 본격적으로 IT 기술인력을 부족 직업군으로 선정하고 이민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인해 당시 많은 한국 분들이 호주로 이민 왔다. 그리고 그들 중의 많은 분들이 네이버 카페를 통해 모임에 가입하게 되어서 회원수는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카페 회원은 호주에 실제 거주하는 분들 뿐만 아니라 한국에 거주하면서 호주 IT이민을 계획 중인 분들도 상당히 많았다.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자가 많이 늘어나고 카페 주인과 나는 뭔가 다른 전략을 세웠어야 했다. 바로 "커뮤니티"로 만들어 가기로 했다. 그동안 나와 카페 주인 두 사람이 이끌던 모임을 여러 사람들을 동참하게 만들었고 좀 더 다양한 주제로 오프 라인 모임을 준비하기로 했다. 아울러 온라인 카페에서도 취업 정보뿐만 아니라 호주 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나 실제 회사를 다니는 분들의 경험담을 생생하게 올리는 등의 많은 콘텐츠로 사람들을 모았다.


날씨가 좋으면 야외에서 바비큐와 피크닉을 하면서 이민 생활에 지친 그리고 취업 준비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해소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나도 혼자 홀홀 단신 시드니에 와서 처음 취업을 알아볼 때 아무도 도움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없고 더군다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도 했다.


그렇게 커뮤니티는 점점 제대로 자리를 잡아갔고 회원수는 점점 더 늘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아지면 늘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그것은 의견 충돌이었다.

나와 카페 주인과 같이 커뮤니티를 이끌어가던 팀에서 슬슬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은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토론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결국 누군가는 팀워크를 깨는 행동을 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카페에서 활동하기를 원했고 그것은 원래 카페의 목적과 취지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길고 긴 대화의 끝에 결국 팀이 쪼개졌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도 많았다. 다들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쁜 의도도 아니었다. 하지만 커뮤니티라는 그 순수함에 스크래치를 냈다.


그 과정은 나에게도 큰 피로감을 주었다. 안 그래도 회사에서 하는 일도 많아지고 점점 회원들의 연령들은 젊어지고 무엇보다도 그전보다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과 맞닥들어졌다. 떠날 때라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카페도 커뮤니티도 더 능력 있고 젊은 친구들이 잘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바통을 넘기고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도 커뮤니티에서 연락이 왔고 간간이 소식도 전해 들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그런 것들도 끊어지고 한동안 카페를 잊고 살았다.




작년에 그러다가 우연히 카페 주인장을 길거리에서 만났다. 이제는 나에게 호주 이민의 역사에 있어서 추억이 되어 버린 그 카페가 떠올랐고 우리는 그렇게 길거리에 서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힘들고 외롭던 시절에 서로를 도와주었던 사이였던 터라 그래도 정이 많았다.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난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페 방장은 이제 더 이상 네이버 카페는 하지 않은 다고 했다. 내가 떠난 이후에 젊은 친구들과 커뮤니티 시즌2를 만들면서 나름 즐거운 추억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오래가지 못했고 회원수는 그대로지만 실제로 활동하는 회원수가 많이 줄었다고 했다. 주된 이유는 스마트 폰 시대에 많은 취업정보를 다른 곳으로부터 찾을 수가 있기 때문에 굳이 이런 카페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예전에 취준생으로 준비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 그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고 이제는 그때 가졌던 절박함이 더 이상 없기에 커뮤니티 참석과 활동이 없어져서 더 이상 카페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졌다고 했다.


대신 여전히 연락되는 사람들끼리 카톡에서 단톡방을 만들어서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고 가끔 만나서 식사도 하곤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단톡방에 가입하라고 했다. 그렇게 우연한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카페 방장과 의견충돌이 많았다. 결국 내가 떠나는 것으로 방향을 잡기는 했지만 당시는 썩 그렇게 좋은 기분으로 헤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런 것들을 잊게 만들었고 당시의 텐션은 이미 사라졌고 좋았던 감정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단톡방에 가입했다.




최근에 단톡방 회원들과 햇살이 좋은 어느 오후에 야외 식당에서 맥주를 한잔 하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참석한 사람들 중에 IT전공 중인 대학생도 있었고, 한국에서 웹디자인을 하다가 너무 힘들고 지쳐서 호주에 왔는데 여기서 직장 생활하려고 준비 중이라는 분도 계셨고 영주권 때문에 잠시 다른 업종에서 일했는데 이제는 영주권이 나와서 다시 자신이 원하는 시큐리티 쪽을 공부해서 나중에 취직하고 싶다고 하시는 분도 있었다.


15년도 더 지났지만 그때가 생각났다. 나도 이들처럼 처음 시작은 도전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희망만이 나를 지탱해 주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을 그래도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같이 카페를 운영했던 팀과 회원들과의 교류도 한몫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당시 카페 활동을 열심히 할 때는 정말 일주일에 한 번씩은 얼굴을 보고 만났다.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서로의 고민들을 마구 쏟아내면서 공유하고 위로해 주고 했던 시절이었다. 가족들 다음으로 자주 만났다.


이젠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때만큼 열정이 없다. 동기부여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좋다. 특히 젊은 친구들이 나오는 오프라인 모임에 가보면 가끔은 열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경우도 생긴다. 그들이 던지는 질문들에 대답하고 조언을 해주다 보면 다시 뭔가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럴 때마다 옆에 있는 카페 방장했던 친구가 나를 말린다.




단톡방에 있는 카페 방장과 예전에 카페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됐던 몇몇 지인들과는 가끔씩 이렇게 만난다. 이제는 다들 각자 회사에서 자리도 잡았고 더 이상 신입사원이 아니라 리더로 성장해서 잘하고 있어 보인다. 각자의 가족들도 호주에 잘 적응해서 아이들은 많이 성장했고 시간이 참 많이 지나갔다.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서로가 다 안다 그리고 이해해 준다. 가끔씩 만나더라도 좋은 사람들이 서로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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