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프리미어 축구에는 중요한 두 사람이 있다. 바로 구단 운영 사장과 감독이다. 물론 경기를 직접 뛰는 선수들도 아주 중요하지만 특정 구단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사람들이 바로 저 두 사람들이다. 구단 운영 사장은 비즈니스를 책임지는 사람이고 감독은 경기의 결과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이 두 사람들의 케미스트리, 협업 그리고 조합이 얼마나 좋은가에 따라 구단의 성공이 결정되는 경우도 많다.
구단 운영 사장은 감독이 원하는 선수들을 스카우트해 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돈이 빠질 수 없다. 그래도 대부분 구단 운영 사장들은 감독이 원하는 선수들을 사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대신에 구단 운영 사장들은 감독에게 기대가 있다. 그만큼 선수를 사줬으니 성과를 내야 한다고 감독에게 기대한다. 일종의 압박이다. 대부분의 감독들도 다 안다. 모든 경기 결과의 몫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구단 운영 사장이 처음부터 감독을 압박하지는 않는다. 감독에게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주는 것이 관례이다. 새로운 선수들이 팀에 적응하고 그래서 좋은 팀을 만들어 과정(빌드업)에는 물리적인 최소한의 시간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들이 다 가기 전에는 결과가 안 좋아도 격려하고 무한 신뢰를 준다. 일부러 언론을 통해서 지지하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다 가고 나면 본격적인 압박을 한다. 사실상 그때부터가 중요한 시간이다.
회사에서 신규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그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스폰서가 있고 프로젝트를 이끌어 가야 하는 리드가 지정된다. 프로덕트 매니저가 대부분 그 리더십 롤(role)을 부여받게 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회사에서 하는 역할이다. 기획안에 대해 스폰서 그룹이 승인을 하고 예산(돈)이 확보되면 프로덕트 매니저는 팀을 셋업해야 한다. 프로젝트의 성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기에 프로덕트 매니저는 자신이 원하는 팀원들을 요청하는데 사실상 협상이 필요하다. 모두가 좋아하는 선수는 모두의 리드가 다 같이 데리고 일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도 끝까지 원하는 선수(직원)가 있다면 그 협상에서 포기하면 안 된다. 스폰서를 협박을 해서라도 그 팀원을 데리고 와야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이런 경우 한쪽은 손해를 봐야 하고 한쪽은 반대로 기쁠 수 있다. 결국엔 이런 모든 것들이 부담으로 온다. 결과적으로 잘되면 아무 일 없지만 만약에 혹시 중간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말이다.
프로덕트 매니저가 새로운 프로젝트 팀이 생기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정확한 목표와 비전을 공유해야 한다. 왜 우리는 모였고 뭘 해야 하고 우리가 할 일들에 대한 가치들을 말해야 하고 때로는 설득을 해야 한다. 이런 것은 사실 한 번의 미팅으로 안된다. 시간 날 때마다 계속 중간중간 툭툭 던지면서 머릿속에 박히도록 해야 한다.
그다음 프로덕트 매니저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보통 새로운 플랫폼이나 프로덕트를 개발할 경우 처음 2-3개월 정도는 성과가 잘 안 보인다. 이런저런 조사와 시도들을 하면서 사실 실패의 연속이다. 팀원들이 가장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순간들이기도 한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로 팀을 이끌고 있는 리더인 프로덕트 매니저다. 이 기간 동안은 절대로 팀원들을 압박하면 안 된다. 그들도 빌드업의 시간이 필요하다. 기술에서 안 되는 것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들의 실패도 인정하고 오히려 더 동기부여를 해 줘야 한다. 충분한 시간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팀이 빌드업을 하고 있는 시간에도 프로젝트 스폰서들은 매주 매주 제품 개발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서 물어보기도 하고 왜 아직도 뭔가가 안 보이는지 모르겠다면서 의심하면서 동시에 좀 속도를 낼 수 없는지 등등으로 압박을 가해온다. 이런 순간에 프로덕트 매니저는 오롯이 팀 편에 서서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 혹시 만에 하나 특정 팀원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문제라고 하거나 그로 인해 지연이 되고 있다고 할 경우 모든 신뢰는 무너진다.
이건 축구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중요한 경기에서 한 선수의 실수나 부진으로 경기를 망치는 경우가 생긴다. 그때 감독이 인터뷰에서 선수들의 잘못은 없다. 전술을 정한 내 잘못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오늘 누군가는 경기를 망쳤다고 말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팀원들이 빌드업을 하는 과정에 프로덕트 매니저는 스폰서들에게 중간에서 팀을 대신해서 소통을 잘해야 한다. 지금은 시간이 필요하고 좀 더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서 설득해야 한다. 그렇게 팀원들에게 좀 더 많은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
팀원들에게 압박을 주는 시간은 따로 있다.
충분히 빌드업 시간을 주었고 충분히 연습과 실패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뒤. 그러고 나서도 만약에 팀원들이 여전히 간절하지 못하고 여유를 부린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이다.
압박은 말로 하면 안 된다. 그러면 감정싸움이 된다. 더군다나 외국에서 회사생활 할 경우는 말로써 압박을 할 경우 인신공격이라는 것으로 인해 퇴사의 사유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대신 정확한 목표 설정을 통해 압박을 유도해야 한다.
빌드업을 하는 과정에는 특정 일(task)에 대해 데드라인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설령 그 일이 끝나야 할 일정을 넘어설 경우라도 더 연장해서 기회를 충분히 준다. 하지만 압박 모드에 들어가는 순간 모든 일들은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정의되고 프로덕트 매니저는 데드라인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팀원들에게 강조해야만 한다. 그리고 오로지 그것으로 평가를 하겠다고 그리고 오로지 그것으로 우리가 그리고 팀전체가 평가받을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1월부터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었다. 과제를 받는 순간부터 한숨이 막힐 정도로 쉽지 않은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팀을 셋업하고 본격적인 제품 개발 과정으로 시작했고 과제의 복잡성으로 인해 빌드업 과정이 만만치 않게 필요할 것임을 미미 프로젝트 스폰서들에게 경고를 했지만 그래도 시작부터 걱정과 부담이 많았다.
충분히 빌드업 시간을 주기로 했다. 팀원들도 그 시간들이 필요했다. 그렇게 1월이 지났고 2월도 금방 지나갔다. 어느덧 시간이 3월 중순에 다가왔다. 그 시간 동안 팀원들의 의견을 100% 신뢰하고 존중해 주었고 기다렸다. 중간중간 나의 생각과 차이가 나는 것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전문성을 인정해 주었다. 팀원들은 이런저런 다양한 검증과 시도를 통해 다행히 복잡했던 몇몇 조각들에 대한 방향이 정해졌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그 조각들을 만들어서 붙이기만 하면 되는 작업만이 남았다.
바로 지난주 금요일 압박이 필요한 시점이 왔다.
준비해 두었던 단기 목표에 관련된 프로젠테이션을 팀원들을 다 모아 놓고 했다. 충분히 빌드업이 된 팀원들도 이제는 본격적으로 액셀레이트를 밟아야 한다고 느꼈다. 프레젠테이션은 30분 만에 끝났고 팀원들에게 준 단기 목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나 질문이 없이 간단하게 끝났다. 단기 목표는 바로 4월 마지막날을 프로덕트 데모 데이로 설정하고 모든 스폰서들을 불러서 우리 제품을 보여주는 일종의 Showcase를 제안했다.
팀원들도 충분히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반대도 없었다. 그들도 안다. 이제는 뭔가를 제대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만약에 그 충분한 시간들을 가지지 못했다고 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에 맡기겠다.
지난 13년 동안 수없이 많은 프로젝트를 하면서 느낀 것은 때로는 압박이 필요하다. 리드의 손에 있는 압박의 카드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그 압박의 카드를 신중하게 적절한 시점에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먹힌다.
당장 다음 주부터 매일매일 진행 사항을 공유하는 미팅을 하는 것으로 전환했다. 이 미팅은 "daily stand up meeting"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팀원들이 돌아가면서 1-2분 정도 어제는 뭘 했고 오늘은 무엇을 할 계획인지 그리고 현재 리스크가 있는지를 공유하는 미팅이다. 15분 안에 끝나는 미팅이다.
한국 직장문화는 달리 외국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자유가 훨씬 더 많이 보장된다. 시간으로 평가하기보다 결과물의 완성도에 따라 평가한다. 아무리 회사에 소속된 직원이라고 해도 개인의 삶이나 인격을 충분히 존중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비즈니스도 해야 한다. 그래서 가끔은 어떻게 이런 것들이 공존하면서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들 때도 많지만 우리나라처럼 꼭 뭐든지 쥐어짜서 빨리빨리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