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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열리는 이야기의 문

그리고 그 책방의 이야기꾼, 다람쥐

by CAPRICORN

FACT

다람쥐는 겨울을 준비하며 도토리와 씨앗을 모은다.

하지만 기억력이 완벽하진 않아, 묻은 장소를 종종 잊어버린다.

잊힌 도토리는 봄이 되어 작은 숲이 되기도 한다.

재빠른 몸놀림과 민첩한 성격으로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먹을 것을 모으는 습성은 ‘저장’과 ‘기록’의 본능과 닮아 있다.

소리를 잘 듣고, 주변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한다.


QUESTION

무엇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고, 무엇이 잊히는 걸까?

다람쥐가 남긴 ‘기록’은 누구를 위한 걸까?

한겨울, 이야기를 수집하는 다람쥐는 왜 그렇게 바쁘게 움직일까?

사라지는 계절 속에서, 다람쥐는 무엇을 지키려 하는 걸까?



잠깐 열리는 이야기의 문

눈이 소복이 내려앉는 밤, 겨울숲 한 켠에서 작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누군가는 그 문을 ‘헌책방’이라 부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겨울의 기억 창고’라 부른다.

이 헌책방의 주인은 다람쥐다.

재빠르고 호기심 많은 다람쥐는, 몇 세대를 거쳐 이 책방을 지켜온 집안의 후계자다.

그들은 책을 팔지 않는다.

대신 책으로 가득 찬 이 공간을 지키고, 기록을 남긴다.

겨울잠에 들기 전, 혹은 들다가 깨어난 친구들이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놓으면,

다람쥐는 펜촉을 들고 재빠르게 그 말을 글로 옮긴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의 저편’에 묻혀 하나의 책이 된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뱀이 찾아왔다.

서가 아래, 따뜻한 온기가 도는 자리에 똬리를 틀고는 한숨을 쉰다.

“다람쥐 양반, 이번에 내 새끼가 말이지…

허물도 다 벗기 전에 인사도 없이 집을 나가버렸어.”

예전에는 서로를 경계하던 이들이지만,

‘겨울’과 ‘기억창고’라는 한정된 공간과 시간 안에서는

잠시나마 친구가 된다.

느릿해진 겨울의 뱀과, 조용히 차를 내린 다람쥐가 마주 앉는다.

“나 때는 말이야, 허물을 벗고 나면 부모한테 인사는 했다고!”

다람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요즘 애들이 좀 그렇지…”

세대 간의 차이는 모든 동물들의 고민거리였다.

실제로 책방 안에도 ‘세대 갈등’이라는 제목의 책이 가장 많았다.

뱀은 한껏 말하고 나서 기분이 풀린 듯, 꼬리를 씰룩이며 책방을 나섰다.

“다람쥐 양반, 다음 봄에 만나도 못 본 체해줄게! 빨리 도망가라우!”

다람쥐는 허허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또 다른 날, 곰이 느릿하게 책방으로 들어왔다.

두툼한 털 위에 눈이 송송 내려앉아 있었다.

“하아… 뱃살이 너무 빨리 빠져. 나이 들어서 그런가 봐. 배가 넉넉해야 겨우내 안심이 되는데…”

다람쥐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 그냥 가만히 있으면 뱃살이 덜 빠지지 않을까요…?”

곰이 벌컥 화를 냈다.

“자네, 나보고 히키코모리가 되라는 말인가!? 공감 능력이 좀 부족하구먼!”

다람쥐는 작게 웃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T와 F의 갈등…


어느 날은 올빼미가 찾아와,

“내 울음소리가 너무 커서 다들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라며 푸념을 했다.

다람쥐는 낡은 서재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내 건넸다.

그 안엔 다른 올빼미들의 이야기와 눈물 자국이 담겨 있었다.

책을 읽은 올빼미는 눈시울을 붉혔다.

“…나 같은 친구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그는 훨씬 가벼워진 모습으로 책방을 나섰다.


다람쥐는 오늘도 모든 이야기를 받아 적는다.

삐걱이는 난로 소리 사이로,

사각사각, 사각사각.

그 이야기들은 책이 되고,

책들은 쌓여,

다시 겨울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겨울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눈도 예전만큼 쌓이지 않는다.

문이 열릴 수 있는 시간도 점점 줄어든다.

그래서 다람쥐는 오늘도

더 빠르게, 더 조심스럽게

이야기들을 모은다.

언젠가, 이 문이 다시는 열리지 않을 그날을 대비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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