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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울리는 목소리

잊지 못하는 아기 코끼리 마하 이야기

by CAPRICORN

FACT

코끼리는 초저주파(18Hz 이하) 소리를 내며 수 킬로미터 떨어진 코끼리와 소통한다.

코끼리는 최대 60~70년까지 살며, 수십 년 전의 물 웅덩이 위치를 기억할 수 있다.

죽은 동료의 뼈를 만지고 곁에 머무르며 애도하는 행동을 보인다.

새끼는 어미 외에도 여러 암컷(이모 코끼리)들이 돌본다.


QUESTION

코끼리는 왜 잊지 않으려 애쓰는 걸까?

그들은 누구를 향해 울고 있는 걸까?

기억은 그들 몸의 어디에 남아 있을까?





하늘이 울었다.

먼 초원 끝자락에서 천둥이 구르고, 공기는 이미 젖은 풀 냄새로 가득했다. 무리는 걷고 있었다.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비가 오기 전에 건너야 할 강이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마하는 어미의 다리를 따라 걷고 있었다.

코는 아직 짧았고, 발걸음은 울퉁불퉁한 땅에 자꾸만 미끄러졌다.

앞에서 바람을 가르던 어른들의 등은 크고 단단했지만, 마하에겐 그 모두가 너무 빨랐다.

비는 생각보다 빨리 쏟아졌고, 강은 금세 불어났다.

물은 소리 없이 땅을 삼켰고, 발아래 돌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리의 중심이 흔들렸고, 어미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물살에 떠밀린 마하의 작은 몸이, 풀숲을 뚫고 사라졌다.

그 누구도, 심지어 어미조차도 그 순간 마하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무리는 계속 걸었다.

소리를 남기지 않은 이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하는 혼자였다.

휩쓸린 그의 몸은 생각보다 훨씬 멀리, 초원 깊숙한 곳까지 떠밀려갔다.

코끝에 낯선 냄새가 스쳐갔다. 먼지를 많이 삼킨 나무껍질의 냄새였다.

그중 한 마리가 다가왔다.

길고 낡은 귀, 깊게 갈라진 이마, 그리고 조용한 코.

그 코는 마하의 어깨를 두 번 만졌고, 한 번은 가슴을 눌렀다.

마라는 조심스럽게 마하를 살폈다. 그는 어렸지만 병들지 않았고, 건강했다.

무리를 중요시하는 코끼리에게, 어린 코끼리를 홀로 남겨두는 선택은 없었다.

마라는 마하를 자신의 옆으로 데려갔다.

다른 암컷들 사이에 자리를 내주며, 아무 말 없이 발을 움직였다.

마하는 그렇게, 마라의 무리에 속하게 되었다.


마하는 겉보기엔 잘 적응한 듯 보였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는 언제나 언덕에 올랐다.


‘우우우우우웅—’


공기가 떨리고, 그의 목구멍에서 낮고 둔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진동은 땅으로 퍼졌고, 밤벌레들이 잠시 소리를 멈췄다.

“나는 여기 있어.”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해는 뜨고, 다음 밤이 오고, 다시 또 언덕에 섰다.

처음 몇 주 동안, 무리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애가 아직 어려서 그러겠지.”

“그리움이야 사라지겠지.”

하지만 몇 달, 몇 계절,

그리고 몇 해가 지나도,

그는 그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어린 수컷 코끼리 중 하나가 언덕 아래에서 마하를 쏘아봤다.

“그만해. 넌 버려졌잖아. 우리 무리에 그냥 적응해.”

마하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행동이 무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미안한 마음 반, 그리운 마음 반. 그러나 그 마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소심하게 구석으로 향한 마하에게 마라가 다가왔다.

“네 가족한테 그 목소리가 들릴까?”

마하는 눈을 감았다.

“알 수 없어요. 하지만… 헛된 기대란 것을 알지만”

마하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코로 눈을 가렸다.

마라는 그의 코에 자신의 코를 댔다. 처음보다 조금 더 길게, 조심스럽게.

“그럼 계속 불러. 언젠가는, 누군가가 정말로 대답할 수도 있으니까.”

그 이후로도 밤이면 언덕 위에서 낮은 소리가 울렸다.

모두는 들었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날도 별다를 것 없었다.

풀잎은 바스락거렸고, 바람은 언덕 위의 고요한 외로움을 스쳤다.

‘우우우우우웅—’

낮고 길고, 아주 오래된 울음. 그래서 그날도, 그냥 그랬다.

소리를 치고 돌아서는 순간,

‘우…우우웅…’

조금 높고, 아주 멀고, 떨리는 소리 하나가

흙 속을 타고 그의 발밑까지 도달했다.

마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공기 속의 떨림이, 진짜였는지 착각이었는지…

그는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우…우우우우웅…’

이번엔 더 또렷했다.

더 가까웠고, 더 익숙한 그 진동.

어릴 적 기억 속, 머리맡에서 들리던 어미의 울음 끝.

그 끝에 담긴 안도, 안타까움, 그리고 이름. 마하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떨기 시작했다.

다리가, 귀가, 코가 흔들렸다. 그는 돌아섰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언덕 아래로 뛰었다.

수년간 움켜쥐고 있었던 기억이 그의 근육 속을 타고 흘렀다.

풀을 짓밟고, 진흙을 튕기며, 그는 달렸다. 40킬로미터의 바람. 그 바람 사이로, 또 한 번의 화답.

‘마하—’

그 울음은 그의 이름이었다. 그거 수년간 잊지 않고 그렸던 그 목소리.

초원 끝자락. 피부는 거칠고, 눈동자는 흐려졌지만 잊혔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코를 뻗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하… 너구나.”

그들은 말없이 서로의 귀를 스쳤다.

그 코와 코 사이에, 수년간 멈추지 않던 그리움이 흘렀다.

태양이 수평선에 걸려 있었다.

그 빛은 두 개의 무리를 나란히 비추고 있었고,

마하는 그 사이에 서 있었다.

왼쪽엔 오래전 잃어버렸던 혈육의 무리,

오른쪽엔 그를 키워준 기억의 무리.

그는 코를 낮추고, 두 무리의 울음을 귀로 들었다.

먼저 다가온 건, 마라였다.

처음엔 조용한 타인이었고, 지금은 누구보다 깊은 시간을 나눈 코끼리였다.

마라는 코를 뻗었다. 마하는 그 코끝을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당신이 없었다면, 저는 자라지 못했을 거예요.”


마라는 코로 그의 코를 훑었다. 그것은 고요한 작별 인사였다. 말없이 전해지는

"잘 가"와 "고마워"의 사이.

그다음, 그는 자신의 동무였던 수컷들과 암컷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릴 적 놀던 놈도, 밤마다 눈치 주던 녀석도. 이제는 그의 기억 속에서 ‘가족’이었다.


마하는 그들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의 옆에는 어미가 있었고, 멀리서 그의 형제들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언덕 아래로 한 발짝 걸음을 옮기다,

잠시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코를 들었다.


‘우우우우우웅—’


공기 속을 울리는 낮은 소리.

그 소리는 이별의 울음이 아니었다.

그건, 다시 부르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소리는 땅을 타고 퍼졌다.

그 언덕 위의 무리도,

그 언덕 아래의 무리도,

모두 그 울음을 들었다.

그리움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리움 속에 ‘누군가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마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의 귀는 바람을 따라 흔들렸고,

그의 코는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밤이 되면 울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누군가가 들을 것이라는 확신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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