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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문이 열린 문이 되기까지

항상 계기는 필요하다. 그런데 어떻게?

by CAPRICORN

Fact

너구리는 개과 동물이지만, 개와는 다르게 겨울잠을 자는 몇 안 되는 종류 중 하나이다.

야행성이며, 혼자 조용히 다니는 습성이 강하고 영역 안에서 은밀히 활동한다.

위협을 느끼면 싸우기보다는 움츠리고 숨는 성향을 가진다.


Question

싸우지 않고 피하는 생존 방식은, 사회 속 인간에게도 하나의 선택일 수 있을까?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존재가 다시 깨어나는 순간, 그걸 기다려준 이들은 어떻게 남아 있을까?

숨는 삶을 택한 너구리를, 누군가는 끝까지 찾아줄 수 있을까?




너구리는 한때 사랑받던 아이였다. 무엇이든 금방 익히고, 눈웃음이 예뻐서, 어른들은 "얘는 커서 뭐가 될까?" 하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어느 순간 무게가 되었다. 학원에서, 학교에서, 자격증 시험장에서. 너구리는 자꾸 멈췄고, 떨어졌고, 뒤처졌다. 기대는 실망이 되었고, 실망은 꾸중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꾸중은 마음의 문도, 실제 방의 문도 닫게 만들었다.


부모는 처음엔 분노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언제까지 이럴 건데?" 아버지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매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머니는 자책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언제부터였는지, 돌아보면 후회뿐이었다. 하루는, 방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러다 너구리가 문을 걸어잠갔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 대답도 없이. 그날 이후,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감정이 무서워졌다. 그 아이가 무너질까 봐, 사라질까 봐.

방 안의 너구리는 무너진 채로 멈춰 있었다. 일어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밥을 먹는 것도. 하지만 문을 여는 건, 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밖에 나가면 뭐라고 말하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었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말은 머리끝까지 차올랐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그건 자존심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창밖에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웃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너구리는 담요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현실과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부모는 매일 문 앞에 밥을 두었다. 반찬이 상했는지 확인하고, 국을 다시 데웠다. 그저 대화 없이 빈그릇만 오가는 모습 속에 어머니는 울지 않기 위해 부엌으로 돌아섰다. 그릇 위에 놓인 귤 껍질 하나에도 울컥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기력해졌고, 침묵에 익숙해졌다. 무언가 말을 하면 오히려 더 깨질까봐 조심스러워졌다. 가끔은 "우리가 얘를 이렇게 만든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면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보지 않았다. 죄책감이 고여 있었다.


너구리도 부모의 상황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병원 가는 걸 미루는 것도, 어머니가 장을 볼 때 일부러 싼 채소를 고르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용돈이 끊긴 건 아니었지만,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도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방은 따뜻했고, 이불은 포근했다. 너무 편해서, 너무 고요해서, 더 나가기 싫었다. 사실은 나가고 싶었다. 가끔은 방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순간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손끝이 저릿하게 얼어붙었다. 결국 돌아서 침대에 다시 눕는 일이 반복됐다. 나가고 싶은데, 못 나가는 자신이 더 싫었다.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여전한 관계가 지속됐다. 누구 한 명이 손을 내밀 법도 했지만 그 누구도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러다 며칠 동안 음식이 방 앞에 놓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지났는데 반응이 없었다. 너구리는 부모님이 자신을 잊었나 본인을 돌아보기보다 먼저 부모님을 탓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삼일이 지나고 사일이 지났다. 몰래 부엌에 나가서 음식을 가져왔지만 집안 자체가 서늘했다. 며칠 동안 집에 아무도 없었다.

너구리는 집안 곳곳을 살폈다. 집은 노후됐고 부엌 한켠에 세워진 부모님 사진에서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거실 식탁 위에 꽂혀 있던 10년 전의 자신이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때의 나는 저렇게 웃었는데. 문득 거울 속의 너무 많이 늙고 초췌한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났다. 너무 한심했다. 그러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너구리 밥 줘야 하는데..."

"사고 당해서 정신 없었으면서! 본인 몸부터 챙겨야지! 너구리가 먼저야??"


둘의 대화에 너구리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너구리는 현관문을 먼저 열었다. 몇 년 만에 제대로 마주한 부모님은 나이가 너무 들어있었고, 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에 놀란 듯했다.


그래도 그들은 꼭 안았다. 달라진 서로를 제대로 마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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