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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릭 Oct 11. 2022

크지만 작은 것

급한 걸음으로 카페 2층을 올랐을 때, 남자는 한눈에 실내 안쪽에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창이 없는 왼쪽 벽면 아래로 화장기 없는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나약해 보이지만 단단한, 마치 소나기가 지나간 뒤 늘어진 풀잎들이 다시 햇살을 받으려 힘을 주려는 듯 그녀는 꼿꼿하게 등을 세운 채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너무 초연해 보여서 순간 걸음이 멈춰졌다.


남자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의식적으로 숨을 고르고 다시 그녀에게로 나아갔다. 그를 발견한 여자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를 털어내 버린 듯 홀가분한 그 표정이 남자를 불안하게 했다. 중앙의 몇몇 테이블을 제외하곤 꽉 채운 사람들의 소음이 이상하리만치 멀리서 웅웅거리고, 익숙한 재즈 트리오의 경쾌한 리듬이 공기를 뚫지 못하고 허공을 둔탁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다가가면서 남자는 며칠 전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결말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괜찮아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자리에 앉으며 남자가 물었다.


여자가 답했다. “약간 몸살 기운이 있었어요.”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져 있었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날씨도 쌀쌀한데 왜 나왔어요.”


“아니에요,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도 여기까지 올 필요는 없었잖아요. 문자라도 줬으면 내가 찾아갔을 텐데.”


“정말 괜찮아요. 너무 누워만 있었더니 좀 움직이고 싶었어요.”


“찬바람 마시고 도지면 어쩌려고.” 남자의 걱정스런 눈빛이 여자를 나무랬다.


“환자 취급하지 말아요. 저 보기보다 건강해요. 근육도 많고.” 여자가 방긋 웃으며 지난번 체육공원을 걸으면서 그랬던 것처럼 팔뚝을 구부려 보였다.


그 모습에 그때까지 표정이 굳어있던 남자도 웃고 말았다. 여자도 따라 웃었다. 그 힘없는 웃음이 남자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짧은 웃음 뒤로 정적이 흐르려는 찰나, 마침 진동벨이 울렸다. 여자가 일어서려는 걸 남자가 먼저 일어나 벨을 빼앗았다. 여자가 순순히 앉으며 말했다. “오늘 추천하는 스페셜티가 있어서 주문했는데 어떨지 모르겠어요. 제건 코코아예요.”


“추천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남자가 빈웃음을 지었다.


음료를 찾으러 내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남자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 연락이 뚝 끊어져버린 뒤로 이미 결말을 확신하고 있긴 했지만, 갑자기 오늘 그녀가 굳이 그의 집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이 그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더욱이 평소 느껴보지 못한 최근 이런 종류의 감정 상태에 대해 남자는 점점 더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어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연가를 낸 상태였는데 조금 전 갑자기 문자를 보내왔던 것이다.


한주가 지나도록 여자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자, 남자는 자신이 저지른 무모한 시도에 대한 대가를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고만 다짐하고 있었다. 아마 그땐 확인보다는 솔직한 것이 그녀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으로 고백한 것이었겠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확신도 없으면서 격정을 쏟아 내버린 자신의 행동을 이기적이고 한심하다고 자책하면서도, 또 점점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감정적 상황에 어떤 식으로든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리화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자는 혼란스런 마음에 음료를 내주는 직원의 환한 인사에 대꾸조차 못했다. 다시 내딛는 계단이 마치 허공을 걷는 것만 같았다. 먼저 연락을 취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부정적인 결론에 치우쳐버린 남자로서는 그것은 선을 한참 넘는 행동이라 여겼던 탓에 시도할 생각조차 못했다. 무모했든 정당했든 어쨌거나 이미 질문은 던져진 것이고, 그로서는 그저 대답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감당해야 한다는 다짐은 그동안 그녀의 묵묵부답에 완전히 무용지물이었다.


2층에 오르고 다시 그녀의 얼굴이 보이자 남자는 자신이 받아들인다는 다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그건 물러선다는 뜻이었을까. 정말 이대로 잊는다는 것이 그녀에 대한 감정에 책임일 수 있는 걸까. 아, 그 무엇이든 여자의 답이 있어야 했다. 그는 깊은 수렁에서 밧줄이 내려오기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앉은 남자는 손잡이를 돌린 잔을 그녀에게로 밀었다. 여자는 최대한 온기를 들이키려는 듯 코코아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얼굴 앞까지 끌어올렸다. 그녀가 마시는 걸 남자는 커피를 마실 생각도 잊고서 보고만 있었다.


“커피는 어때... 안 마셔요?”


“아...”


남자가 깨달은 듯 커피잔을 잡았다가 다시 그대로 일렁이는 갈색 물결만 바라보았다. 남자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뭐라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가 혀로 입술만 다시는 걸 본 여자가 잔을 내려놓았다.


“선배...”


남자가 고개를 들었지만 이제 여자의 눈은 우유 거품과 뒤섞이며 만들어낸 코코아 문양에 가 있었다. 여자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남자는 미동도 없었다.


“사실 난 선배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남자의 놀란 눈동자가 흔들리며 동공이 순간적으로 열렸다. 그렇게 이어진 그녀의 말은 그로서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파견 나온 그날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선배는 기억 못 하겠지만 난 대학에서 봤을 때부터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어요. 선배와 어떤 특별한 일이 생길 거라는 이상한 믿음... 선배는 이런 느낌을 감상적이라고 우습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상관없어요. 결국 결과는 내 것이 되었으니까.”


“지금 그러니까.... 지금....” 남자의 불안정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맞아요. 선배가 고백했지만 그전부터 제가 좋아하고 있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다면...”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 침을 삼켰다.


“전 어느 정도 호감을 보였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전달되진 않았던 거 같아요. 처음엔 야속하다가 이 남자는 정말 모르는구나란 걸 깨달으면서, 저곳은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굳이 억지로 설명해야 아는 감정이라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그리고 만약, 의미를 부여한 내 감정 자체가 착각이라면... 감정은 스스로도 속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생각과 다르게 또 마음은 그렇지 않고.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그런... 어쨌든 감정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꾸역꾸역 어떻게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날 갑자기 선배가 그렇게 말했던 거예요.”


“왜 말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남자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땐 저도 혼란스러웠어요.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장난치는 건가. 아닌데... 장난칠 사람은 아닌데... 그런데 갑자기 왜? 도대체 왜? 이제 와서? 왜? 그때가 속앓이하다 이제 마음을 접어야지 다짐하던 때였어요. 그까지 가는게 쉽지 않았었거든요.” 감정이 북받친 여자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숨을 가다듬으려는 듯 얇은 숨을 길게 내쉰 다음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몸살이 왔어요.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들이 순간 풀려버린 탓인지. 아마도 생각보다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나 봐요. 누구 때문에 말이죠.” 여자가 기쁜지 슬픈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남자의 눈을 맞추던 여자의 시선이 다시 잔을 만지작거리는 손으로 갔다.


여자의 말을 듣고 있는 남자의 머릿속 기억들이 이리저리 재빠르게 움직이며 그 연결고리들을 이어 붙였다. 여자의 단어들, 그 말투와 표정들. 그때 그녀의 작은 움직임까지 되살아나며 순간적으로 지금 남자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결말은 남자로서는 너무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녀의 말들은 바로 이 순간 믿기지 않는 상황에 대한 그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한번 천정을 올려보던 남자가 나직이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자세를 가다듬은 다음 남자가 말했다.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 기분이 지금 내 심정과 비슷할 거 같아요. 아, 나도 몸살 걸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완전히 긴장이 풀려버렸어요. 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한 숨을 길게 내 쉬었다.


여자는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도 여자를 바라보았다. 서로가 측은하기도 하고 우습기도한, 처음 느껴보는 애틋한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꽤 시간을 두고 말없이 보고만 있던 두 사람의 입가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한참을 웃었다. 눈빛과 웃음이 서로를 다독거리는 듯했다.


남자가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여 여자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그런데 그래서 고마워요. 내가 먼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이진씨를 찾아낸 대견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줘서. 내가 원하는 걸 나 스스로 깨우칠 수 있게 해 줘서요. 그냥 순조롭게 아무 일 없이도 갈 길을 갈 수 있었겠지만.... 물론 이건 결과 일 뿐이지만... 지금 이 절심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줘서 너무 고마워요.” 여자의 눈가에 조금씩 눈물이 맺혀 드는 게 보였다.


여자를 잡은 남자의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내 마음이, 지금 이진씨를 향한 이 벅찬 마음이... 아...” 남자는 불안정해진 호흡 때문에 잠시 말을 멈춰야 했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잘 정리 되질 않아요.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내 마음이 비할 바 없이 크고 깊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마음이 당장 내일, 그리고 수십 년 뒤 내가 가질 마음에 비해서는 아주 작을 거라는 거요. 난 지금 이것만 알겠어요. 나머진 좀 더 진정되고 나서 이야기해야겠어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체 못 한 눈물이 빨갛게 물들어가는 그녀의 뺨을 따라 굴렀다. 그때까지 웅웅거리던 말소리와 둔탁하게 울리던 음악소리들이 희미해져 저 멀리로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주변을 채우는 모든 사물들과 별도로 그들을 둘러싼 공간은 오로지 두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



# 나 그대의 사랑이 되리 - 제이레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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