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민낯이 드러난 계기
둘째가 내반족(club foot)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아기가 자궁을 뚫고 세상에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연노랑의 태지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앙앙 첫울음을 우는 아기가 간호사의 손에 들려 아기침대로 옮겨졌을 때 나는 그 분주함 속에서도 작디작은 오른쪽 발이 안쪽으로 한껏 굽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아기가 좁은 뱃속에서 기지개를 켤 때 내 뱃가죽 위로 드러났던 선명한 발바닥은 왼쪽 발이었음이 확인되었다. 아기의 담당 소아과 의사는 내 병실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아기의 내반족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해 주었다. 관련 자료들을 잔뜩 쥐어주면서 내반족은 충분히 교정이 가능하다고 여러 번 힘주어 말했다. 그는 아마도 기형으로 태어난 아기에 놀랐을 나를 안심시키려 했던 것 같다. 그는 병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문을 닫고 퇴장할 때까지 “Your baby is so beautiful!”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의 눈빛에는 연민, 우려, 격려, 그 모든 따뜻함이 담겨있었다. 몇 번의 방문 후 그는 내가 보인 의외의 덤덤함에 오히려 놀란 눈치였다. 물론 내가 아기의 발을 처음 보았을 때 흠칫 놀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기형에 대한 이질감 때문이 아니라 아뿔싸, 그럴지도 몰랐던 가능성을 미처 염두에 두지 않았던 내 허술함 때문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남편은 두 발이 모두 내반족으로 태어났다.
나의 가련한 시어머니는 연약한 자신의 자궁 때문에 행여 아기가 잘못될까 봐 임신기간 내내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조심하셨는데 그런 조심성이 오히려 아기의 활동을 방해해 두 발이 내반족으로 태어난 것이라 자책하고 계셨다. 가난했던 시부모님은 아기의 발을 고치려고 빚을 내었고 수술할 의사를 사방으로 찾아다니셨다. 발품 팔아 겨우 수술을 시켰지만 그 당시 의료 기술로는 완전한 치료가 불가능했고 남편의 발은 유연성을 잃었다. 고정된 발목은 오래 걷거나 뛰는 것에도 한계를 느꼈다.
신혼 초에 우리는 함께 수영을 배우러 다녔다. 내가 수영을 유독 좋아해서이기도 했지만 남편이 해내기에는 수영만 한 운동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남편은 자라는 동안 한 번도 수영을 배워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오전에 개설된 수영강습반은 모두 아줌마들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이미 수영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굳이 다시 강습반에 들어갈 이유가 없었지만 남편이 아줌마들과 줄 맞춰 쭈뼛하게 강습받는 것을 멋쩍어했기 때문에, 그럼 내가 강습을 차근차근 받아서 남편에게 그날 배운 수영기술을 그대로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오전반 강습이 끝나고 나면 남편을 불러다 아마추어 일대일 수영강습을 다시 시작했다. 나는 남편의 수영 자세를 보고 자주 웃었다. 빵 터진 내 웃음소리가 수영장 벽에 부딪쳐 메아리치곤 했다. 나로서는 도무지 그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남편은 발차기를 할수록 자꾸 뒤로만 갔다. 발차기는 전진을 위한 것인데, 남편의 발은 물을 차면 찰수록 후진하는 신기술을 가졌다. 우리는 결국 수영 배우기를 포기하고 내내 물장구치며 놀다 기진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나는 남편의 걸음걸이를 사랑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걸음은 마치 축복 속을 거니는 자유로운 춤사위 같았다. 나는 모퉁이를 돌아 춤추듯 걸어오는 그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순수를 동시에 느꼈다. 그것은 거룩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나에게 자신의 장애를 고백했을 때, 나는 그것이 오히려 더 위대해 보였다. 나는 감탄했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에 심한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내 둘째의 내반족이 크게 걱정스럽지 않았다. ‘너에게는 좋은 모델이 있으니 우리, 이 여정을 잘 이겨내 보자.’ 했던 것이다. 우리 부부는 아기의 기형에 대해 매우 초연했으며 앞으로의 치료 과정을 꼼꼼하게 살피는 것 외에 다른 관심이 없었다.
아기의 내반족은 우리 부부의 단단한 결속, 그 바깥에서 문제가 되었다. 양가 부모님들의 반응은 우리에게 생각지도 못한 상처를 남겼다. 인간은 극단적인 역경에 부딪히면 비난하거나 고발할 대상을 찾는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 속죄양의 메커니즘‘이 우리의 부모들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시아버지는 나를 공격했다.
“너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잘해 왔는지 돌아봐라. 혹, 임신기간 중에 너가 섭취한 음식에 문제가 있었거나 너의 행동거지에 문제가 없었던 건지 한번 생각해 봐.”
수화기를 통해 전해진 날 선 정죄의 칼날이 채 회복되지 않은 내 자궁에 와서 꽂히었다. 그는 아기의 내반족이 행여 아들로부터 유전된 것일까, 그것이 자신의 아들에게 되려 정죄함이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아들을 보호하려는 아비의 삐뚤어진 사랑이 그 아들의 하나뿐인 아내를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한편, 나의 친정엄마는 사위를 공격했다.
“그렇게 말렸는데도 기어이 조혈모세포 기증을 하더니! 그것 때문에 몸이 약해진 거 아니야? 그러게 내가 그때 하지 말라고 얼마나 말렸니?”
친정엄마는 몇 년 전 사위가 조혈모세포 기증 했던 것이 화근이라며 모든 책임을 사위에게 전가시켰다. 딸을 보호하려는 어미의 본능은 엉뚱하게도 딸이 가장 사랑하는 하나뿐인 남편을 공격하도록 만든 것이다. 말로만 품은 ’ 내 며느리, 내 사위‘는 극한의 상황에서 남이 되고 제 자식의 열렬한 반대자가 되어 버렸다.
그들의 반응은 우리 부부에게 큰 상처로 다가왔다. 아기의 기형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온 형벌이란 말인가, 내가 믿는 하나님이 내가 은연중 저질렀을지도 모를 잘못에 대해 꽁한 마음을 품어오다가 ‘옳거니, 너도 한 번 당해 봐라!’ 라며 아기에게 분풀이하시는 분이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은 너무 옹졸하고 가학적이다. 내가 지금껏 의지하고 사랑했던 하나님이, 인간의 방식 중에서도 가장 하등 한 방식으로의 복수를 채택하고 그것을 당하는 인간을 내려보며 낄낄대는 치졸한 분이었던가.
아기의 내반족은, 3대째 혹은 4대째 내려오는 믿음의 가정이라고 자부하던 화려한 겉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벌거벗은 신앙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모든 가족들이 패닉에 빠졌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셨던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한정적인 사고에 제동이 걸렸다. 만약, 우리의 앎에 오해가 있었던 것이라면 수정이 시급해 보였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제목의 이미지는 네이버에서 가져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