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변 전쟁 속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면서 나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는 ‘가치‘에 대한 생각이었다. 내가 좇아왔던 모든 것, 삶의 필수 조건이라 여겨왔던 많은 요소들이 실은 부수적인 것이었으며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장신구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아이가 정상이 아닌 것이 오히려 좋다니까. 기대가 없잖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그 말에 다른 의도, 일테면 나에게 상처를 주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음을 그의 담백함과 말의 뉘앙스로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언짢았다기보다 그 말속에 담긴 삶의 진짜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그 말을 나에게 건넨 사람은, 자신의 아이들이 미국 시골에서 머무는 동안 혹여 사투리 영어를 배우게 될까 걱정이라고 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자신의 아이들이 미국 방송에 나오는 아나운서처럼 표준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었다. 건강한 아이를 키우면서도 ’ 건강’ 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이 부러워할만한 조건들을 갖추고자 하는 욕심은, 한 번도 채워진 적 없는 밑 빠진 항아리일 뿐이다. 나에게 그 말을 건넨 그는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하다. 나는 그가, 누군가에게는 ‘고작!’이라는 평을 들을만한 사소한 욕망까지도 서슴없이 드러냈다는 것에 오히려 놀랐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구를 가지고서도 겉으로는 겸손과 교양으로 가장하고 있으며 같은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나 역시 드러내지 못할 사소하고 하찮은 욕망들이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순간마다 의식한다. 아이를 향해서는 특히 더 그렇다. 건강은 당연한 것이고 보여지는 모습들, 외적인 것뿐 아니라 지성과 인성을 두루 갖춘 초인적인 만능인이 되기를 바란다. 나를 찢고 태어났으므로 마치 내가 창조한 것마냥 자녀는 곧 나의 소유가 되고 내 인생의 성과물이 되어버린다. 자녀가 우상이 되어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목격하는가.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에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것만을 기도한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그랬던 것이 왜 시간이 지나면서 건강 이외의 다른 것들을 구하게 되는 것일까? 사람은, 이미 소유한 것에 대한 만족이 반나절도 유지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는 동물들이 사람보다 더 낫다.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와 유지는,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큰 교훈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 우리를 두신 것은 자연 속에 숨겨둔 ‘자족’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하고 문득 생각한다. 사람이 건설한 도시는 자연을 깎아내고 몰아내어 더 이상 보고 배울만한 자연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풍요 속에 있는 도시의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시골 사람들 보다 더 여유가 없고 늘 부족하다 느끼는 것은 아닐까.
화음이가 태어난 후, 나는 다시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기도를 되찾았다. 물론, 사람의 욕심을 양분 삼아 자라나는 마귀가 나의 욕심을 키우려 틈만 나면 달콤한 유혹을 슬쩍 흘려두지만 이제는 적어도 그것이 유혹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예민해졌고, 고개 털어 떨칠 수 있을 만큼의 단호함도 생겼다. 나는 때로, 선율이를 키우면서 나에게 시나브로 자라났던 교만과 욕심이 끝 간 데 없이 솟아오르니 그것을 막으려고 화음이를 주셨나,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나님 앞에서조차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내밀한 욕심과 자기 자랑이 산산이 부서지고 나의 자녀가 나의 것이 아님을 알게 하셨다. 나는 그저 이 땅에서 청지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픈 경험을 통해 알게 하셨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일 중 하나는 배변을 처리하는 일이다. 기저귀를 떼야하는 나이에 기저귀를 떼지 못한 아이는 제 몸에서 나오는 배설물의 더러움을 인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배출은 되레 즐거운 놀잇감으로 격상된다. 어느 날,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잠든 아빠 옆에서 놀고 있던 아이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손잡이를 잡고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짚어 내려오던 아이가 계단 손잡이 틈으로 엄마의 모습이 보이자 우뚝 멈춰 서서 소리를 내었다. 설거지를 멈추고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올려다본 아이의 모습은 처참했다. 발가벗은 몸에 온통 똥칠을 하고 똥 묻은 손으로 계단 손잡이 하나하나 꼼꼼히 짚어 내려온 아이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짜릿하고 즐거운 놀잇감을 찾아낸 모험가의 뿌듯함이 온통 똥빛인 몸뚱이를 뚫고 마지막 보루로 남겨진 하얀 치아를 통해 드러났다. 그런 현장을 맞닥뜨리면 아악,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카펫에 뭉개놓은 똥밭을 지나 샤워실에 집어넣고는 뜨거운 물을 콸콸 틀었다. 아이의 몸을 닦아내면서 저 현장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면서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남편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 아연실색할 현장은, 나만의 잔상으로 남게 하고 싶었다. 나는 그것이 어쩌다 한번 있을 해프닝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배변 전쟁의 서막이었을 뿐, 같은 일은 수시로 반복되었다. 수년에 걸친 훈련과 학습, 윽박지름과 눈물의 호소에도 아이는 배변 훈련을 습득하지 못했다. 나는 종종 아이의 더러워진 몸을 씻어내면서 아이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언제까지 엄마가 네 똥을 만져야 해!”, 잔뜩 주눅이 든 아이가 위축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면 나는 안쓰러운 그 아이를 붙들고 샤워기 물줄기 속에서 엉엉 울었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아이를 수발들지 못할까 봐 두려워진다. 날이 갈수록 배변 문제 앞에서 뾰족해지고 초조해지는 나를 보게 된다. 이런 일을 매일 치르다 보니 스스로 자기 몸을 돌볼 수 있는 첫째 아이의 바른 성장에 새삼 감사를 느끼곤 한다. 고통과 은혜는 종종 이토록 잔인하게 짝을 이루어 그 존재감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지인 중 한 명이 신장 수술을 받은 후 배변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화장실에 앉아 통증에 앓으면서 그는 새삼 몸의 신비에 대해 깨달았다고 했다. 나와야 할 것을 배출하는 자연스러운 일과가 얼마나 큰 축복이었던가, 몸의 기능을 잃고 나서야 몸이 본연의 일을 제 때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은혜요, 감사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고백을 듣고 나는 다시 한번 아이를 향해 가졌던 가장 본질적인 기도를 떠올렸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아이의 배출은, 육체가 건강하게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이다. 비록, 육체의 자라남을 정신이 따라가고 있지 못할지라도, 문득 스스로 숟가락질을 해서 나를 놀라게 했던 어느 아침처럼 아이는 스스로의 몸을 돌볼 만큼 천천히 자라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