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응답
신앙인으로서의 나에게 ‘기도‘라는 것은 늘 얼마쯤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내 기도의 역사를 순서대로 길어 올리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노랫말을 붙인 식사 기도이다. 꼬마들이 습득하는 식사 기도는 예나 지금이나 ‘날마다 우리에게~’로 시작하는, 일용한 양식에 대한 감사 노래이다. 매일 제공되는 식사가 당연한 것이 아니며 엄연히 양식의 제공자가 존재한다는 인식과 함께 그에 대한 감사를 배운다. 창조주의 값없는 은혜와 그를 향한 찬양이 어린 입술을 통해 식사 때마다 선포된다. 비록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그저 습관적인 노랫말에 불과했더라도, 적어도 식사의 시작이 기도여야 한다는 것은 배울 수 있었다.
기도에 노래를 붙여 부르지 않을 만큼 충분히 자랐을 무렵의 기도는, 은밀한 요술램프로 변모해 있었다. 자아가 커지고 욕구가 생기자 이루고 싶은 소원들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생일이 다가오는 아이가 받고 싶은 선물 목록을 끝도 없이 쏟아내는 것처럼 마음의 소원들이 요란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폭력적이리만큼 일방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은, 내가 요청하는 쇼핑목록에 한도 없는 황금 카드를 내어주는 결재자로서만 유용한 존재였다. 목록 중 하나라도 누락되면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 있느냐며 철없는 막내딸처럼 마구 떼를 쓰곤 했다. 어린 시절 내가 다녔던 교회는 위압적이고 보수적인 ‘고신‘ 교단이었기 때문에 나의 은밀한 소원들은 다행히 바깥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종교적인 무게에 눌려 발산되지 못한 철없는 기도들은 수정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그것이 기도의 전부인 것처럼 굳어져갔다. 그 정도 수준의 기도를 이어가던 나에게 나의 아빠는 어느 날엔가 가정 예배의 대표기도를 시키셨다. 우리 집은 금요일 저녁마다 가정 예배를 드렸는데 모(母) 교회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과 닮아 경직되어 있었고, 소리 내어 기도하는 법을 알지 못했던 나에게 대표기도는 고문과도 같았다. 나의 대표기도가 예고되었던 그 주의 금요일 저녁은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의 단두대와 같이 하루하루 내 목을 옥죄어 왔다. 나는 그날의 대표기도를 준비하기 위해 매일매일 노트를 채웠다. 완성된 기도문은 고작 다섯 줄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것을 매일매일 고쳐 쓰고 다듬었다. 아빠의 기도를 짜깁기하여 흉내 낸 기도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그날의 공포는, 나에게 소리 내어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대학에 입학해 부모의 신앙적 울타리를 벗어나 주체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비로소 기도가 ‘대화‘임을 알게 되었다. 머리로 안다고 해서 바로 실천이 되는 것은 아니어서, 그동안 말을 하기만 했지 듣는 법을 몰랐던 저돌적인 연설가가 입을 닫고 경청하려 하니 온몸이 베베 꼬이고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대화의 포문을 호기롭게 열어젖힌 것과는 상반되게 와다다다 내 의견만 쏟아내고는 ’오늘 대화 끝!‘ 외치고 꽁무니를 빼버리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하나님은 무모하게도 300명이 넘는 대학생들 앞에 기도 팀장으로 세우셨는데 그것은 마치, 숙련된 어른의 부재로 갑작스럽게 무대에 오른 코흘리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때의 어리숙한 나를 떠올릴 때면, 하나님이 ’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는 것을 나로 시험해보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어찌 됐든 그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나는 하나님과 마주 보고 대화하는 법을 익혔다.
지금의 나는, 하나님과 함께 숲을 걷는다. 폴 투르니에가, ”내가 언제나 어느 주제에 대해서도 가깝고 친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반자는 예수 그리스도시다.(모험으로 사는 인생)”라고 말한 것처럼 나는 하나님과 함께 산책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책을 읽는다. 그럼에도 막연하고 추상적인 기도의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하나님의 응답을 응답으로 받지 못해 실망과 분노의 순간들을 반복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 지혜, 사랑, 굳건한 믿음 같은 것들을 막연하게 구했다. 그것의 성취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는 꿈에도 모른 채로 말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하셨듯이 ’ 지혜’를 어느 날 떡, 하니 던져 주실 줄 알았다.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속에서 도깨비방망이가 한번 휘둘릴 때마다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온 것처럼, 어느 개운한 아침에 100을 조금 넘는 나의 아이큐가 160으로 치솟아 컴퓨터의 처리속도 못지않게 변해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나의 기대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 체득하도록 이끄셨다. 경험으로 얻은 지혜는, 나의 피와 살에, 나의 영과 혼에 켜켜이 쌓여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나만의 보물이 되었다.
‘에반 올마이티’라는 영화에서 신으로 나오는 모건 프리먼이 이런 대사를 한다.
누가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면 신은 그 사람에게 인내심을 줄까요? 아니면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까요?
용기를 달라고 하면 용기를 주실까요? 아니면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까요?
만일 누군가 가족이 좀 더 가까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뿅 하고 묘한 감정이 느껴지도록 할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요?
나는 이 말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방식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릴 때부터 바라왔던 추상적인 기도들에 하나님은 모두 응답하셨다. 특별히, 화음이를 통해서 나는 ’ 지혜, 사랑, 믿음’과 같은 성품들을 가꾸어가고 있다. 고통은 그 자체로 이로운 것은 아니지만 고통을 통해 비밀한 하나님의 방식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므로 고통은, 하나님의 역설적인 축복인 셈이다.
사람들로부터 기도제목을 요청받을 때, 나는 자주 ‘화음이가 몸이 자라는 것만큼 인지능력도 자라가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 부탁했다. 그 기도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 갈지 전혀 가늠하지 못했다. 나는 미련하게도 여전히, 하루아침에 뿅, 하고 지혜를 선물로 받은 솔로몬처럼 나의 기도도 그렇게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다. 그런데 어느 아침에 화음이가 일어나 분무기를 발견하고 싱크대와 화장실을 오가며 온 집을 물바다로 만들었을 때 나는 문득, 내가 부탁했던 기도제목들이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순간, ‘이 따위 장난질은 당장에 그만두라’는 잔소리를 멈추고 화음이의 동선을 조용히 좇아갔다. 실패를 거듭하며 흔들리는 손으로 겨우 분무기에 물을 채운 화음이가 창 가까이 놓인 화분들에 다가가 분무질을 시작했다. 곱아들어간 세 번째 네 번째 손가락은 분무질을 번번이 방해했지만 그런 불편을 아랑곳하지 않고 식물에 물을 주는 기쁨에 집중했다. 칙칙 뿌려진 물이 식물의 잎사귀에 송글송글 맺히자 화음이의 얼굴도 환희로 반짝였다. 나를 돌아본 아이의 눈은 성취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나의 기도가 이렇게 하나하나 아이의 경험과 나의 경험으로 엮여 단단하고 올이 풀리지 않는 작품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엄마의 행동을 관찰하고 모방할 수 있을 정도로 인지가 자랐다는 것, 분무기에 물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집중력이 생겼다는 것, 사소해 보이는 이 모든 순간들이 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은 또 이 순간들을 활용하여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인내’까지 짓고 계시는 것이다.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내 모든 기도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내 일상에 흩뿌려 놓은 반짝이는 기도의 응답들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내가 느끼는 기도의 참 맛이다.
*제목 사진 출처 : https://blog.naver.com/julyhoho/222105836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