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思考)는 시간을 초월하지만 감정은 시간에 구속된다

고통 중에 인내하는 법

by 채플힐달봉
사고(思考)는 시간을 초월하지만 감정은 시간에 구속된다
-모니크 크레스만-

책을 읽다 만난 문장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다. 한 자 한 자 곱씹어 삼키고는 고개 끄덕이며 ‘맞아, 정말 그래.‘ 맞장구를 쳤다. 지난 12년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수없이 쓰고 지우고 다시 썼던 기록들이 컴퓨터 폴더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폴더의 이름들도 제각각이다. 고통 속에 있을 때 여과 없이 터져 나왔던 감정의 파편들이 지뢰처럼 잠들어 있다가 폴더를 열어 확인하는 순간, 여전한 폭발력으로 마음에 와서 박히었다. 그럼에도 그날에 내가 느꼈던 생생한 고통은 시간을 지나오면서 바래고 성숙되어 그날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으로 해체된다. 감정은 그 시간 속에서만 유효하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고통하는 자들에게 더없는 축복이며, 성숙된 사고는 고통을 뛰어넘는 해석을 남긴다.


며칠 전, 느헤미야를 묵상하다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이나 돌보셔서, 그들이 아쉬운 것 없게 하셨습니다. 옷이 해어지지도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습니다. (느헤미야 9:21 새번역)‘ 라는 구절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40년 광야길을 걷는 동안 온갖 불평과 하소연, 원망으로 내내 울부짖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그날의 고통을 뛰어넘어 축복을 읽어낼 수 있는 시선을 가지게 된 것이다. 광야에 서 있는 동안에는 절대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세심한 돌보심이 광야를 벗어나고서야 비로소 아, 하는 회한(悔恨)과 함께 줌인되어 또렷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남편은 이따금씩 내가 공개하는 글들을 읽거나 내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듣고는, 우리가 겪는 현재진행형 고통을 너무 격하시키는 것 아니냐, 마치 모든 고통을 초월한 인간인양 가식을 떨고 있는 것 아니냐며 답답함을 호소하곤 한다. 남편은 나의 최측근이자 고통 속을 함께 걷는 동지요, 내 모든 눈물과 분노의 의미를 아는, 또 다른 나이므로 그가 보는 실제의 나는 어쩌면 글 속에 담긴 나보다 훨씬 나약하고 무력할지 모른다. 나 역시 남편의 호소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남편은 내가 위로받기를 원한다. 내가 흘리는 당장의 눈물이 남들에게도 보여지기를, 그리하여 뜨겁게 이해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함께 피 흘리며 싸우는 전우로서 그 또한 ‘우리’를 벗어난 누군가로부터 지금의 전투를 이해받고 싶어 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와 같은 처지의 누군가에게는 고통의 동질감을, 그것에서 오는 공감과 위로를 전하고자 하는 마음도 크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바라는 대로 내가 만약, 컴퓨터 여기저기 흩어놓은 기록들처럼 날 것 그대로의 현재진행형 고통을 공개적으로 뱉어낸다 한들 그것이 우리가 겪는 고통을 그 자체로 오롯이 드러낼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철 지난 고통이 시간 속에 희석되어 당장의 날 것 그대로의 감정만큼 폭발적이지 않다 해도, 나는 오히려 지나온 시간들을 기록하는 지금의 내가, 그 날의 고통을 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보이지 않았던 세심한 돌보심을 시간을 초월하여 깨달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이다.


고통 속에 있을 때에는 그 누구도 몰랐던 ‘내일‘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괴로움에 몸서리쳤던 무수한 밤 한가운데서도 그분은 함께 계셨으며 나를 돌보셨다. 나는 이제야 그분의 도우심을 읽어내는 눈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이 기록은, 시간을 초월하여 내가 찾아낸 그분의 흔적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그 언젠가 또 시간이 흘러, 지금의 고통 역시 재해석될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내일이지만 그때에는 알게 될 것이며 감추어진 의미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의 고통을 여과 없이 분출하기보다 보류를 선택한다. 지금을 해석할 수 있는 언젠가의 성숙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