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옮겨 붙듯이
그 오후에, 나에게 용기 내어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한 번의 전화에서 그치지 않고 마음을 쏟아, 나와 공동체를 위해 고민했다. 나는 그녀의 열심이 어쩌다 나를 향하게 되었는지 그 시작을 알 수는 없지만-우리는 대개 그것을 성령의 일하심이라고 부른다-, 그녀의 마음을 동했던 동기가 무엇이었든 그것의 가장 견고한 바닥에는 사랑이 깔려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녀가 화음이의 선생님을 자처하고 나선 그날로부터 9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한 사람이 9년 동안 변함없이 같은 자리를 지켜준 것은 놀라움과 미안함, 고마움이 한데 엉켜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어쩌면 내가 모르고 지나쳤을 어느 순간에, 심한 내적 갈등으로 몸서리를 쳤을 수도, 틈만 나면 달겨드는 권태와 밤새 씨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그 자리를 지켜온 것은, 그녀가 종종 나에게 말하곤 했듯이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념, 교회의 가장 드러나지 않는 찬 구석 자리라도 내 한 몸으로 데울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나서게 되는 사명, 그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우연히 웹 검색을 하다가 지나치기 힘든 그림 하나를 보았다. 나는 이 그림을 보고 단번에 그녀를 떠올렸다. 모두가 마음은 있으나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저할 때 아무것도 갖춘 것 없어 그 자신조차도 의심을 다 떨치지 못했던 그때에 저요, 손 들어준 그녀의 결단과 용기는 교회를 움직이고, 무엇보다 나를 변화시켰다. 폴 투르니에가 그의 책 ’고통보다 깊은 ‘에서 언급했던 용기의 전염이 그날의 나에게 체험되었던 것이다.
삶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힘든 것이며, 심지어 대다수에게는 혹독하기까지 하다. 시련을 당하거나 상실에 직면하면 더욱 힘들어진다. 삶은 많은 용기를 요구한다. 나는 그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용기는 가르쳐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염시켜야 한다.
[고통보다 깊은]-폴 투르니에
그녀는 지금까지도 종종 스스로를 ‘전문가(장애아 교육)‘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곤 하지만 나는 그녀를 ‘화음이 전문가‘로 부른다. 사실 그녀는 전문가가 아니라고 겸손을 떨기에는 화려한 이력, 다년간의 유치원 원장 경험을 가진 탁월한 교육자였다. 나는 지난 9년 동안 주일학교와 관련된 일 외에도, 화음이의 전반적인 성장 고민들을 그녀와 함께 나누면서 조언을 얻었다. 그녀는 주일학교 교사일 뿐 아니라, 화음이를 함께 키우는 든든한 동역자요, 객관적인 시선을 제공하는 검열자로서 지난 세월을 나와 함께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문성이 빠졌다는 두려움과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처음 앞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문가‘가 아닌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전문성을 뒷받침해 줄 누군가였다. 마침내 그녀가 함께 섬길 전문가-언어치료를 전공한-를 찾아 그와 함께 화음이의 주일학교 선생님을 자처했을 때, 나는 그간의 외로움이 일순 물러가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훗날, 흐려진 기억 속에서 불현듯 하나의 장면을 떠올렸다.
그녀가 처음 나에게 전화를 했던 그 오후로부터 몇 개월 전, 나는 교회에서 개설한 중보기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 목사님은 참석한 모두에게 기도제목을 물었다. 내가 내어놓은 기도제목은 화음이의 발달에 관한 것이었다. 화음이의 인지능력과 성장이 발달 곡선을 이탈하지 않고 더디더라도 잘 따라가 주기를, 더불어 양육하는 부모의 지혜도 함께 구했다. 그곳에 모인 모두가 나를 위해 통성으로 기도해 주었는데 마무리 기도를 하시던 목사님께서 뜬금없이 나의 ‘외로움’에 대해 언급하셨다. 나는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던 외로움을 들킨 후, 적잖게 놀랐다. 내가 그간 어렴풋이 느껴왔던 미묘한 불편함이 ’외로움’이었다는 것이 판명되는 순간이었다. 외로움을 ’외로움’이라고 명명하고 나니 모호하던 정체가 뚜렷한 실체를 가지고 나를 휩싸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외로움을 절감했다. 목사님은 내가 이 교회 안에서 외로운 신앙생활을 하지 않기를, 공동체의 보호 안에 안전함을 경험하기를 위해 기도하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날의 기도 이후, 심각한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화음이의 주일학교 선생님을 자처한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잊고 있던 목사님의 그 기도-나를 한없이 바닥으로 끌어내렸던-를 떠올렸다.
기도의 성취는,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는(로마서 8:28)’ 순간에 이루어진다.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나만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화해와 조화, 모두의 믿음이 함께 성장하도록 일하신다는 것을 나는 이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섬김의 순수한 결단은, 나란히 꽂힌 성냥의 불이 서서히 옮겨 붙듯이 섬김의 불씨를 전이시킨다. 나는 그 해, 여선교회 임원으로, 교회 월간지의 교정 담당으로, 일대일 제자 양육자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원했다. 내가 나를 폐쇄된 자기 연민으로 몰아넣지 않고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게 한 용기는, 한 사람의 결단으로부터 왔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그녀가 나에게 전이시킨 그 용기에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