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내가 다니고 있는 한인교회는 이 지역 내에서 꽤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남편이 post doctor 과정을 시작했을 때 같은 연구실에 있던 청년 한 명이 교회의 트럭을 빌려 우리의 이사를 도와주면서 자연스럽게 이 교회로 인도받게 되었다. 이 교회는 특수하게도 유학생, 연구년 비지팅의 수가 주변 다른 교회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교회였다. 이민자들과 단기 비지팅 사이의 생태는 텃새와 철새의 차이만큼이나 다르기 때문에 이 지역 교회는 비지팅이 주로 모이는 교회와 이민자들이 주를 이루는 교회로 서서히 나뉘어 고착화되었다.
우리 교회는 비지팅이 모이는 교회였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8월 중순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떠나는 사람들과 새롭게 들어오는 사람들로 어수선했고 1년을 주기로 교회의 얼굴들이 전체적으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는 이곳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는 한인들에게는 이별로 인한 잦은 상실감과 1년 단기 여행자들을 반복적으로 케어해야 하는 고단함을 느끼게도 만들었다. 정착자들 중에는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안정적인 구조의 타 교회로 옮겨가기도 했다. 이 교회에 남아 수년동안 섬김의 자리에 있는 분들을 보면, 그들은 상실과 고단함을 수용하고 파송과 사명이라는 사고(思考)의 대전환을 이루신 분들임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처음에는 ’ 비지팅‘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 교회의 구조가 오히려 편안했고 같은 시기에 이곳을 방문한 분들과 끈끈한 동지애로 묶여 신나게 단기 미국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화음이의 장애진단을 받게 되면서 불과 1년 사이에 우리의 신분이 단기 방문자에서 이민자로 전환되는 격변을 겪었다. 정착인으로서 이 교회에 출석해 보니 그제야 이 교회를 오래 지켜온 정착자들의 고충이 보이기 시작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매년 이별의 계절이 다가오면 상실감으로 몇 날을 앓아야 했다. 다음에는 이만큼 정 주지 말아야지, 결심도 여러 번 했었다. 상실감을 잘 다루지 못해 끙끙대면서 나는 자주 교회를 옮겨야 하나, 고민했다. 더 큰 문제는 장애를 가진 화음이가 소속될 부서가 이 교회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비지팅 위주의 교회이다 보니 장애아이를 데리고 미국 단기 연수를 오는 가정이 거의 없었고 지역 정착인들은 대개 장애부서가 잘 갖추어진 타교회를 선택해 출석했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는 화음이 외에 다른 장애아동이 한 명도 없었다.
화음이가 영아(0-2세) 일 때에는 큰 문제없이 영아부에서 다른 아기들과 다르지 않게 섞여 있을 수 있었다. 문제는 만 3세가 되면서부터였다. 영아부에 머물기에는 다른 아기들에 비해 덩치가 커 아기들의 움직임에 위협 요소가 되었고 유아부로 진급하기에는 기능적 수행 능력이 떨어졌으므로 화음이와 다른 아이들의 교육이 통합되기가 어려웠다. 영아부 담당으로 계시던 권사님께서 나의 사정을 안쓰럽게 여기시고 화음이의 영아부 생활을 연장시켜 주시긴 했지만 그 역시 시한부였기에 빠른 시일 내에 화음이의 주일학교를 찾아야만 했다. 그런 고민이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고여있던 어느 주일에, 영아부로 화음이를 데리러 갔을 때 영아부 교사로 계시던 집사님께서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셨다.
“화음 엄마, 성가대 봉사하는 것도 다 욕심이지. 그 욕심 다 내려놓고 아이 돌보는 것에 엄마가 전념해야 하지 않겠어? 엄마 말고 누가 해? 엄마가 아이한테 100% 헌신해야지. “
아찔했다. 나는,‘저는 이미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화음이에게 100% 헌신하고 있다구요! 제가 주일 예배 1시간 동안 영아부에 아이를 맡겼다고 해서 저의 헌신을 그런 식으로 매도하시는 건 심한 비약이에요!‘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 역시, 그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 위축되어 네네, 하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서러운 마음은 숨길 수가 없어서 집에 돌아와 눈물을 훔치고 내내 근심했다. 나는 그 이후로 성가대에 몇 달간 설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눈에는 ‘아이를 팽개치고 제 욕심으로 성가대에 서 있는 엄마‘로 비칠지 모른다는 의식이 생겨버린 것이다. 내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모두가 사실은 나를 비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이 끊임없이 나를 공격했다. 사탄은 이토록 치졸하고 집요하다. 나는 점점 예배가 즐겁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 오다가다 인사만 주고받던 교회 자매님이었다. 나의 사정과 근심을 전해 들은 그녀가 나의 번호를 알아내 용기 내어 전화한 것이었다.
“다은 자매, 화음이를 엄마 혼자서만 돌봐야 한다는 생각은 말아요. 화음이는 교회 공동체 모두가 함께 돌봐야 하는 우리의 아이지요, 절대 엄마 혼자서 다 감당해야 하는 게 아니에요. 화음이가 있어서 우리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더 풍성해지고 건강해지는지 모두가 알게 될 거예요. 화음이는 축복의 아이예요. 나는 다은 자매가 낙담하지 않았으면 해요. 화음이를 키우면서 어려운 중에도 성가대에서 찬양하는 자매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위로가 되고 도전이 되는지 몰라요. 상처되는 말들,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말고 털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우리 함께 고민하고 좋은 길을 찾아봐요.”
그녀의 전화는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집 앞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다가 핸들을 붙들고 꺼억꺼억 울었다. 말 한마디에 무너져 함몰 직전이던 마음이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에 다시 불끈 힘을 얻고 재건되기 시작했다.
언어에는 영혼이 담긴다. 그래서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것이다. 나를 살린 그날의 언어에는 그녀의 사랑과 격려, 앞으로의 소망이 모두 담겨 있었다. 수화기로 전해진 그녀의 말들은 그저 절제된 단어들의 조합이 아니라 영혼이 넘나드는 통로가 되었다. 그녀의 영혼이 수화기를 타고 건너와 나의 주눅 든 영혼을 한껏 안아주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품이 참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