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희망은 우리였지만, 우리의 희망은 당신들이죠
언젠가 'N포 세대'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결혼도 포기하고, 집도 포기하고, 차도 포기하고, 뭐 아무튼 이것저것 다 포기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 단어가 비단 90년생들만을 지칭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뭔가 오해받는 기분이 들어서 얘길 하자면. 정확히 말해 '포기'한 적은 없다. 내가 무슨 90년생들의 대변인 씩이나 되는 인간도 아니거니와 그럴 자격도 없지만, 최소한 나와 내가 봐온 주변의 또래 친구들, 형과 동생들은 전부 그랬다. 우리는 포기한 적 없다. 왜냐하면, 포기라는 건 목표든 희망이든 애초에 뭔가를 가져야만 할 수 있는 거니까.
한때 우리가 가졌던 희망은 순전히 기성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기대다.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자라나서, 그럴듯한 간판의 명문대에 진학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 그다음 아들은 일찌감치 군대에 다녀와 소년티를 벗고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고, 좋은 학점에 장학금까지 받아가며 졸업한 뒤에는 하루빨리 대기업에 취직해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날 부모님이 자랑할만한 자식이 돼야 한다. 한편 딸은 통금시간을 지키는 정숙한 숙녀로 자라나 전도유망한 사윗감을 데려와야 하는데, 그 사윗감이란 꼭 딸보다 서너 살쯤 많고 학력도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어야 안심이 되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런 게 우리 세대가 진심으로 바란 꿈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유감스런 일이다. 이건 우리의 꿈이 아니라 우리 부모님 세대의 꿈이다. 우리는 그런 부모님의 꿈을 대신 이뤄주는 것을 사명처럼 여기라고 배웠다. 매일같이 아버지가 회사에 나가 벌어오는 돈이며, 어머니가 챙겨주는 아침밥의 따뜻함 같은 것들을 강조하면서, 부모님께서 우리들 세대에 걸고 있는 기대가 얼마나 대단한지, 또 어느 만큼 위대한 희생을 치르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들으며 자랐다. 그러니 이제와 '왜 너 스스로 가지는 목표 하나 없느냐'고 물어봤자 할 말이 없다.
부모님 세대의 바람이며 기대가 근본부터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부족하지 않을 만큼 벌고, 자신에게 딸린 식구들 굶기지 않으면서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키워내는 일이 위대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 역시 아니다. 그러나 그건 수십 년 전의 미덕이었다. 우리가 자라난 세상에서, 행복이란 예전처럼 단순히 정의 내릴 수 있는 개념이 못 된다. 누군가에겐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가족을 지키며 대를 잇는 일'이 자신의 알량한 꿈 따위보다 더 가치 있게 느껴지겠지만, 그저 부모의 기대에 맞게 살며 기특한 자식이 돼서 얻는 보람이 그만큼이나 큰가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심지어 오늘날 거의 모든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실망과 체념과 인내밖에 보여주지 않는데 말이다.
삶은 녹록지 않다. 스스로 밥벌이를 하면서 생존하는 것, 나아가 날 바라보는 존재들을 책임지고 먹여 살리는 것은 더욱이 어렵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사람은 때때로 원치 않는 상황이나 일을 감내해야 한다. 당신들은 답답한 사무실에서, 모래먼지 날리는 현장에서, 불친절한 고객들 사이에서, 한여름 뜨거운 가스불 앞에서, 제각기 힘겨운 시간을 버텨내며 우리를 책상 앞에 앉혔다. 자식 세대에게 좀 더 나은 기회를 물려주기 위해. 글을 몰라서, 지식이 부족해서, 세상의 모든 위대한 꿈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던 당신들의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그런 마음을 알기에 그 과정도 결과도 모두 고마운 줄 알았다.
당신과 우리의 모든 불행은, 이제와 보면 전부 사농공상 때문이었다. 낡은 단어라는 건 알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다. 충분히 위대해 보였던 부모님의 모습 대신 사회가 존경하는 것들을 닮아가라 시켰다. 밭일하고 자재 나르고 물건 들여와 팔면서, 한때 좇았던 꿈과 몇백 광년은 떨어진 일까지 하면서 책임진 당신들이, 그저 '무슨사士'가 아니란 이유로 무시받는 사회가 못돼 처먹었다는 생각은 안 했으니까.
'자랑스럽게 부모님을 닮아갈 권리'는 고귀한 자녀들에게만 주어진다. 정말이다. 결코 갈등론이나 계급투쟁에 입각해 내는 의견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 세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학창 시절 우리가 <장래희망> 공란에 뭘 채워 넣었는지 기억나는가? 부모님이 의사인 친구가 '의사'를, 판검사인 친구가 '판검사'를 쓰는 건 자주 봤지만, '동네 슈퍼마켓 주인'이나 '건설업자'라고 쓰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당장 내 학창 시절 동창들만 해도 그렇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의사였던 그 친구는 현재 의대 졸업을 앞두고 있고, 아버지가 부장검사였던 친구는 서울대 경영학과에 진학해 동대학 로스쿨을 준비하는 중이다.
실제로 이 두 친구는 무척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부모님을 (최소한 직업적인 면에선)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점, 그 발자취를 걸어가는 데 있어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 그래서 각기 공부하는 이유와 방향성에 대해 보이는 자신감과 확신이 선명했다는 점 등에서는 아주 비슷한 면도 있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같은 반에서 같은 수업을 들었던 그 친구들이 어떻게 '그토록 노력할 수 있었는지' 당시엔 지레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하기야 내 아버지는 택시 드라이버로 일하다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식당에서 홀서빙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집에 있는 몇 권의 책 속에서 롤모델을 찾아야 했다. 윤동주, 조세희, 박완서와 헤밍웨이 같은. 그래 놓고 장래희망란엔 '저널리스트'라 써넣었다. 부끄러워서. 어머니는 내가 가진 꿈들이 '창피하고' '딱 굶어 죽기 좋은' 것이라 말했다. 한 번은 보란 듯 불로 지져 태우는 퍼포먼스까지 해 보이셨는데, 내 또래 친구들 대부분이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봤다는 사실은 뭐, 새삼스럽지도 않다.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모두에게 비슷한 기회가 주어진 들, 모집정원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누구나 수능을 칠 수 있는 세상이라고 모두가 명문대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쉽게 얻은 기회만큼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다. 죽어라 노력해 97점을 받아봤자 나머지가 다 100점이면 꼴찌가 되는 현실이다. 그래놓고 정당한 패배를, 노력의 부족을, 의지의 박약을 받아들이라 말한다. 그 따위로 할 바에야 다 포기하고 부모 곁으로 돌아가 버리라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에게 말을 꺼낼 때는, 돌아가 고독한 얼굴을 드러내 보일 때는, 스스로를 패배자라 느끼고 있을 때뿐이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몇 개 없다. 뭐가 있을까? 일단 미안하다는 말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내게 걸었던 기대만큼 해내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이제 우리에게 남은 희망은 당신이 일궈낸 집뿐이라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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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해당 브런치북 연재분이 <마카롱 사 먹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 출판사를 통해 정식 출간되었습니다.
따라서 3화 이후의 전문은 보여지지 않으며, 중간에 책 구매 링크로 전환했습니다.
가급적이면 저도 오픈해놓고 싶지만, 제 글을 믿고 투자해준 출판사, 그리고 이 부족한 글을 책으로 구매해 책장에 꽂아놓으실 독자분들께 저 나름의 예의를 지키고 싶습니다.
따라서,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는 죄송스럽지만, 나머지 내용은 책을 구매해서 읽어주세요.
책에 실린 것은 편집자의 손을 거친 글로서 온라인 버전에 비해 훨씬 깔끔한 문장이 되었습니다.
제가 즐겁게 쓴 글을 여러분 또한 즐겁게 읽고, 또 생각날 때마다 책장에서 찾아뵐 수 있다면
저로선 더없는 행복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