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꼰대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05년 영화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 트릴로지의 시작을 알린 기념비적 작품이다. 제목처럼 브루스 웨인이 고담시의 흑기사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데, '어린 시절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극복하면서 영웅으로 거듭나는' 히어로 영화의 교과서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후속작인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선악의 양면성과 인간의 본질 같이 비교적 고차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문자 그대로 다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반면, <배트맨 비긴즈>는 보다 희망적인 메시지를 품고 있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그린 도입부였다. 브루스는 소꿉친구인 레이첼과 놀다가 오래된 우물 속으로 떨어진다. 이때 우물 안쪽의 동굴에서 무수한 박쥐 떼가 들이닥치고, 소년 브루스의 마음속에 깊은 공포심이 자리하게 된다. 구조된 뒤에도 한동안 악몽에 시달리던 브루스.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 토마스 웨인이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부분이다.
"박쥐들이 왜 널 공격하는지 아니?" 토마스가 말한다. "널 무서워하기 때문이란다"
"절 무서워한다구요?" 브루스는 의아하다는 듯이 대꾸한다.
"모든 동물은 겁을 먹어"
"무서운 맹수들도요?" (Even the scary ones?)
"특히 맹수들이 그렇지" (Especially the scary ones. - 넷플릭스 번역 참조)
'꼰대'라는 말은 '요즘 젊은 것들'에 비견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단어다. 다만 인터넷 보급 이후 세대갈등이 표면화되면서 부쩍 사용되는 빈도가 늘었고, 예전보다 좀 더 상징적이고 확장된 의미를 지니게 된 모양새다. 요컨대 오래 전의 '꼰대'가 부모님 세대를 별 대수롭지 않게 지칭하는 데 쓰였다면, 지금에 와선 '고리타분한 사상을 젊은 세대들에게 강요하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감수성을 갖고 있거나'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함부로 말을 하거나' 하는 부정적 뉘앙스가 더해진 셈이다.
한편 '꼰대'라는 건 기성세대가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다. 새삼스럽기도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 세대가 쓰는 오만가지 어휘 가운데서도 유독 꼰대라는 말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게 정신적인 대미지가 상당한 건지, 요즘은 '이런 말 하면 꼰대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같은 말로 밑밥을 까는 어른들도 자주 보인다. 이거야 누가 들어도 '나만큼은 꼰대로 보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정도의 의미 아닌가. 뭐, 내 기준으론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부터가 꼰대가 아니라는 증거같지만.
기성세대가 꼰대로 불리길 두려워하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은 뭐가 됐든 뒤쳐져 도태되는 것을 불안해하는 동물이다. 몸은 늙어갈지언정 정신만큼은 늘 청춘에 머물러 있길 바란다. 자신도 모르게 사회에 홀로 동떨어진 개체가 되고, 차츰 정서적으로 고립되는 과정을 좋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제각기 자신만의 선 내지 지향점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당신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갖고 있다' 고 말하는 건 어떤 면에서 쌍욕보다 치명적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으레 간과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기성세대도 한때는 '요즘 것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시절이 엄청난 옛날도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세대가 부모님 세대에게 느끼는 부정적 감상들을 그들이라고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지금의 우리가 그렇듯 기성세대 역시 이전 세대에 대한 염증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커서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 '적어도 나는 다음 세대에게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겠지' 같은 생각도 한 번쯤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항상 눈 깜짝할 새 지나가버린다. 정신 차려보니 벌써 젊은 세대의 부모, 스승, 상급자가 돼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는데, 그런 자신을 더러 추하게 늙었다느니 사고방식이 낡아 빠졌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맘 편히 들을 수 있을 리 없다. 내가 그렇게 증오하고 미워했던, 결단코 그리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사람들처럼 변해 있다니. 누가 봐도 꼰대인 사람조차 젊었을 땐 우리만큼이나 꼰대가 싫었을 텐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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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해당 브런치북 연재분이 <마카롱 사 먹는 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 출판사를 통해 정식 출간되었습니다.
따라서 3화 이후의 전문은 보여지지 않으며, 중간에 책 구매 링크로 전환했습니다.
가급적이면 저도 오픈해놓고 싶지만, 제 글을 믿고 투자해준 출판사, 그리고 이 부족한 글을 책으로 구매해 책장에 꽂아놓으실 독자분들께 저 나름의 예의를 지키고 싶습니다.
따라서,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는 죄송스럽지만, 나머지 내용은 책을 구매해서 읽어주세요.
책에 실린 것은 편집자의 손을 거친 글로서 온라인 버전에 비해 훨씬 깔끔한 문장이 되었습니다.
제가 즐겁게 쓴 글을 여러분 또한 즐겁게 읽고, 또 생각날 때마다 책장에서 찾아뵐 수 있다면
저로선 더없는 행복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