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안인희 역(문학동네)
아마 중학교 입학 선물로
엄마에게 받은 책이었으리라.....
1989년 7쇄 판, 문예출판사의 데미안.....
속지가 누렇게 변해버린 이 책을
나는 버리지 못하고 거의 30년 가까이 지니고 있었네.
처음 읽었던 중학교 시절,
나는 이 책이 어려웠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야기는 왜이리도 지루하고 딱딱한지.....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읽었을 땐,
싱클레어는 보이지 않고 오직 데미안만 보였다.
데미안처럼 독심술을 쓰고 싶은 맘에
애꿎은 앞 친구 목덜미를
수업시간 내내 노려보기도 했었다.
지금의 청소년 시기를 깨고 나가면
멋지고 새로운 세계가 나를 기다리리라 생각했었다.
성인이 되고 난 지금
다시 만난 '데미안'은
무엇이든 마음 먹으면 이루어진다는 희망도,
깨고 나가면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도 아닌
내 내면에 집중하고, 나 자신을 들여다 보라는 이야기를
내게 건넨다.
그토록 거대하고 대단해 보였던 데미안은 희미해 지고,
찌질하고 나약해 보였던 싱클레어는 또렷해졌다.
이제 와 다시 보니
싱클레어의 삶에 모든 것들은 그 자신이 원하고 선택한 것이었다.
그는 나약했고, 방황했고, 고뇌했지만
그런 상황마다 데미안을, 피스토리우스를, 크나우어와 심지어는 크로머까지도 끌어당긴 것은
그의 의지였다.
내가 누군가와 불편한 것도,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것도,
상황이 원치 않는 곳으로 흘러가는 것도,
다수 속에 있어도 나 홀로 고립되는 듯 한 것도
결국은 내 안의 아프락사스 때문이다.
내가 만들어 놓은,
내가 만들었지만 내가 오히려 지배 당하고 있는
내 안의 아프락사스.....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마다
나는 아프고, 괴로웠고, 슬펐고, 우울했다.
그래서 인정하려 한다.
선함과 악함, 그 양면의 자아를...
나는 나, 너는 너...
각자의 마음 속 아프락사스를
인정하고 수긍하리라.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길의 시도이며 좁은 오솔길을 가리켜 보여주는 일이다.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건만,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어떤 이는 둔하게, 어떤 이는 더 환하게, 누구나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누구나 제 탄생의 찌꺼기를, 저 근원세계의 점액질과 알껍질을 죽을 때까지 지니고 다닌다.
-p.9-
모든 사람의 기원, 그 어머니들은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 하지만 깊은 심연에서 밖으로 내던져진 하나의 시도인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p.9-
나는 매트에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더러움을 두 발에 묻힌 채 집에선 알지도 못하는 그림자를 집으로 끌어들였다.
-p.23-
그는 갑자기 말을 너무 많이 했다고 후회하는 듯 말을 멈추었다. 나는 당시 이미 그가 느낀 감정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었다. 그토록 편안하게, 그리고 겉보기로는 경솔하게 자기 생각들을 털어놓곤 했지만 그는 언젠가 말했듯이 '그냥 말하기 위해서만 하는' 대화를 죽도록 참기 힘들어했다. 그런데 그는 내게서 진짜 관심 외에도 세련된 수다에 대한 지나친 즐거움, 지나친 장난 혹은 그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완벽한 진지함의 결핍을 느꼈던 것이다.
-p.78-
아, 삶은 얼마나 김빠진 맛인가!
-p.85-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p.110-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
-p.115-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게. 자연이 자네를 박쥐로 만들었다면 스스로 타조가 되려고 해서는 안 돼. 자넨 이따금 자신을 괴짜라 여기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간다고 스스로를 비난하지. 그런 짓은 말아야 해. 불꽃을 들여다보게, 구름을 올려다보게. 예감들이 나타나면, 영혼 안에서 목소리가 말을 시작하면 그 소리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고,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지 또는 그 어떤 신에게 어울리는 일일까 묻지 말게! 그런 질문은 자신을 망칠 뿐이니까.
-p.132-
친애하는 싱클레어, 우리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야. 그 신은 신이며 동시에 악마지. 자기 안에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어. 아프락사스는 자네의 생각 그 어느 것도, 자네의 꿈 그 어느 것도 반대하지 않아.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게. 하지만 자네가 언젠가 흠 없이 정상적인 사람이 되면 이 신은 자네 곁을 떠날 거야. 자네 곁을 떠나서 자신의 생각을 담아 요리할 새로운 그릇을 찾아보겠지.
-p.132-
언제든 무언가 진짜 미친 생각, 죄 많은 생각이 떠오르거든, 싱클레어, 누구를 죽이고 싶거나 아니면 어떤 엄청나게 추잡한 짓을 하고 싶어지면 한순간만 생각해보게. 자네 안에서 그런 공상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프락사스라는 걸! 자네가 죽이고 싶은 인간은 아무개 씨가 아니라, 틀림없이 하나의 위장에 지나지 않을 거야. 우리가 어떤 인간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 모습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미워하는 거지.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자극하지 않는 법이니까.
-p.136-
"우리가 보는 것들은," 피스토리우스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이야. 우리 안에 있는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은 없어.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사는 거지. 자기 밖의 모습들을 현실이라 여기고, 자기 안에 있는 본래의 세계가 발언할 수 없게 하니 말이지. 그렇게 해서 행복할 수도 있어. 하지만 한번 다른 것을 알게 되면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선택하지는 않게 되지.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은 쉽지만 우리의 길은 어려워. 자, 우리 함께 가보세."
-p.136~137-
나는 때때로 그가 부담스러워서 주인처럼 쫓아버리곤 했지만, 그래도 그 또한 내게 보내졌음을, 내가 그에게 준 것이 그에게서 두 배가 되어 내게로 왔음을, 그도 역시 내게 길을 안내하는 사람, 또는 길 자체임을 느꼈다.
-p.147-
내 꿈은 그의 입을 통해 내게로 되돌아오고, 설명되고, 해석되었다. 그는 내게 나 자신에게로 갈 용기를 선물해주었다. 아, 그런데 지금 나는 천천히 그에 대한 반감이 자라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말에서 너무 많은 가르침을 들었고, 그가 오로지 나의 일부분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우리 사이에 싸움은 없었다. 격한 논쟁이나 결별, 청산 따위는 없었다. 그냥 내가 그에게 단 한 마디, 그것도 별로 해롭지 않은 말 한 마디를 했을 뿐이지만, 그것은 우리 사이의 망상이 산산이 부서져 영롱한 유리 조각들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p.149-
전혀 나쁜 뜻은 없었고, 파국의 예감도 없었다. 발언의 순간에 스스로도 완전히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말했던 것뿐이며, 약간은 재치 있고 약간은 악의적인 사소한 발상에 슬쩍 넘어갔던 것뿐인데, 그것이 운명이 된 것이다. 나는 별것 아닌 야만을 부주의하게 행했을 뿐인데, 그에게는 그만 판결이 되고 말았다.
-p.151-
깨어난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자기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 자신만의 길을 계속 더듬어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그 어떤, 어떤, 어떤 의무도 없다.
-p.153-
"태어나는 일은 언제나 어렵죠. 당신도 알죠, 새는 알에서 밖으로 나오려고 애쓴다는 걸. 돌이켜 물어보세요. 길이 그토록 어려웠던가? 오직 어렵기만 했던가? 아름답기도 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그보다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 수 있었을까요?"
-p.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