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는 괜찮으신가요?
해방이 왔다. 드디어 6학년에서 해방되고 4학년 담임이 되었다. 아, 4학년! 초등학생 중에서 제일 초등학생 같은 아이들! 내리 3년 동안 6학년 담임을 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고 보니, 교직생활 신선도가 급감하던 차였다. 그러니 4학년쯤이야 캥거루 아기주머니처럼 넣고 가르칠 수 있겠다.
아이들과 만난 지 이틀째, 하필 체육이 든 날 비가 왔다. 아쉽게도 그날은 우리 반이 강당을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그래도 아이들은 체육 하자고 졸랐다. “비가 오는데? 운동장이 흠뻑 젖었는데?” 내가 거부할수록 아이들은 몸이 달았다. 귀여웠다. 이럴 때 선생님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점수를 딴다.
나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기어코 다른 반이 사용할 강당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최소한 교직 생활이 20년 이상이 되어야 할 수 있는 이른바 '강당 돌려막기'. 어린양들을 데리고 의기양양하게 강당을 향해 갔다. 그리고 강당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을 방목했다. 달리고 싶었던 아이는 신나게 달리게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아이 목청껏 소리 지르게 하고, 바닥에 눕고 뒹굴고 기고 싶었던 녀석들은 기꺼이 옷으로 바닥 청소를 하게 해 주었다.
또한 나는 들뜬 아이들이 흐트러지는 시점을 잘 알고 있다. 저희들끼리 장난을 걸다가, 말다툼이 시작되고, 누군가 울고 불고 하기 직전에 힘차게 호루라기를 분다.
“집합!”
이제 진짜 재미있는 체육시간 시작이다. 나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숙련된 조교처럼 강당 무대에 올라, 매의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체육시간에 지켜야 할 수칙을 발표했다.
“첫째 안전, 둘째 규칙 지키기, 셋째 심판 말에 복종 하기! 이 세 가지를 잘 지키면 행복한 체육 시간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 좌우로 나란히!”
아이들이 교실과는 또 다른 절도 있는 선생님 모습에 선망 어린 눈빛을 보냈다. 이제 준비체조 시범 동작만 보여주면, 아이들은 미처 몰랐던 나의 매력에 푹 빠질 것이다. 오합지졸인 군사를 지휘하는 장교의 위엄이랄까. 그것이 비장의 무기 이른바 ’폼생폼사‘이다.
공식대로 먼저 준비체조 첫 동작인 팔다리 운동 시범을 보였다. 나는 오합지졸 병사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자, 팔을 앞으로 쭉 뻗고 무릎을 조금 굽히면서 내린다!”
나는 각이 서있는 구분 동작을 시작했다. 그런데 팔을 앞으로 쭉 뻗고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는 순간, 바지 밑에서 “뿌욱!” 하는 소리가 났다. 뭔가 시원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깜짝 놀라서 뒤로 손을 가져가 보니 바지가 터졌다. 의욕이 넘쳐 동작이 너무 컸다. 옷 갈아입기가 귀찮아서 체육복 윗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그냥 양복바지 차림을 한 탓이다.
더듬어 보니 한 뼘이 넘게 찢어진 바지 틈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수습 불능이었다. 나는 강당 무대 위에서 슬금슬금 옆으로 게걸음을 치며 걸었다. 그리고 강당 무대 한쪽에 있는 낮은 계단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아, 약간 황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애들아, 그냥 자유시간 하자..”
아이들은 왜 갑자기 준비운동을 안 가르쳐 주냐고 따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껏 자유로워진 익룡처럼 꺅꺅 거리며 강당을 뛰어다녔다. 게다가 숙달된 조교가 지시하지 않아도 아무 탈없이 사이좋게 잘 놀아 주었다. 나는 야심 찬 폼생폼사를 접고 늙은 고양이처럼 조신하게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어떤 아이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멋진 선생님, 어제 체육 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바지는 괜찮으신가요?"
누가 선생이고 누가 학생인지, 아무래도 거꾸로 된 것 같았다. 일기장 검사를 마치고 나 스스로에 대한 자기 고백적 행동발달상황을 써보았다. '친구들과 비교적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나, 분위기에 휩쓸려 필요 이상으로 의욕이 앞서고, 그 결과 스스로 난처한 상황을 초래하는 경우가 가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