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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Nov 25. 2021

예쁘다 선주

세일러문 머리로 할까.  디스코 머리로 할까.

오래전에 들었던 우스개 소리다. 사랑 받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만약 내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겨우 세 가닥만 남았다면 어떻게 하시 겠습니까?  

"삼단으로 곱게 땋아 줄께요."

"그런데 그중 한가닥이 빠지고 꼴랑 두 가닥이 남았다면요?"  

"양쪽으로 멋지게 가르마를 타 드릴 겁니다."

"마지막으로 딱 한 가닥 남았습니다. 어쩌죠?" 

"포마드를 발라 시원하게 올백으로 넘길께요." 

       

작고 소박한 것을 놓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고운 것이 쌔고 쌨다는 말이다. 시골 남자아이들이 짧게 이발한 모습 또한 그렇다. 뒷머리를 바짝 깎아 올려 언뜻 촌스러운 듯 보이지만 잘 보면 그렇지 않다. 짧게 밀어 올린 뒤통수 아랫부분에  파르스름한  감도는 빛은, 시인 조지훈이 쓴 '승무'에 나오는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견줄 만하다. 깔끔하고 시원하다. 그런 아이 곁을 지나면 꼭 한번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여자 어린이들 머리 모양은 더 귀엽고 예쁘다. 치렁치렁 직선으로 내린 머리 모양부터 알록달록한 색깔로 물들인 머리 치장까지 각양각색이다. 묶고 가르마 타고 휘감아 올려 방울이나 꽃 핀을 단 아이 모습은 사시사철 핀 꽃송이처럼 앙증맞다. 내가 본 최고의 머리 모양은 단연 5학년 선주다.


일층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는데, 맞은편에서 여자 아이 셋이 팔짱을 끼고 올라오고 있었다. 좁은 계단에서 옆으로 나란히 올라오니 부딪칠 것 같아 걸음을 멈추었다. 아이들도 멈칫하더니 병아리처럼 한쪽으로 모여 길을 틔어주었다. 그런데 서로 끼고 있던 팔짱은 끝까지 풀지 않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허허 웃었더니, 아이들도 까르르 웃었다. 그런데 그중 머리 모양 하나가 유독 눈을 끌었다. 그 아이가 선주였다.    


앞에서 볼 때는 선녀 머리 위에 왕관을 얹어 놓은 것 보였는데, 지나가면서 보니 비단실로 잘 묶은 수예 작품 같았다. 뒤에서 보니 또 달랐다. 연방 하늘을 박차고 올라갈 듯한 제비 한 마리가 머리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단순한 머리카락이 어떻게 저런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까. 어느 장인의 솜씨가 이렇게 매력적일까. 


그때 나는 문득 '이발은 곧 예술'임을 강조하던 우리 동네 이발사 완산 선생이 하신 말이 떠올랐다. 그는 말했다. "잘 다듬어 놓은 머리 모양은 예술품이지요. 하지만 보름쯤 지나 머리가 길어지면 다시 다듬어야 하니 허무한 작품입니다. 쩝쩝."


해변에 쌓은 모래성처럼 시간이 지나면 흐트러져 버리는 이발이라는 예술. 그래도 남자 머리 모양은 머리카락이 길 때까지 며칠은 유효하다. 하지만 묶고 다듬고 감아올린 여자 머리 모양은 그렇지 않다. 그날 밤이면 무조건 해체다. 선주 머리 모양을 보고 지나가다가, 이 예술을 그냥 보내면 다시 못 보겠다 싶었다아이에게 대뜸 "이렇게 멋진 머리 모양은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함께 있던 친구들이 더 좋아했다. 선주도 쑥스러운 듯 동의했다. 


그날 수업 마치고 나는 마치 사진작가나 되는 것처럼 열심히 선주의 머리 모양을 카메라에 담았다. 정면 측면 후면할 것 없이 다양한 위치에서 셔터를 눌러댔다. 흔들흔들 걸상을 딛고 올라가 위에서 본 모습까지 찍었다. 영리한 선주도 짝퉁 사진작가의 의도에 따라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해주었다. 우리는 호흡이 착착 맞았다.

      

그날 이후, 선주가 새로운 머리 모양으로 학교에 오면, 친구들과 함께 우리 교실로 왔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사진을 찍어 메일로 보내주었다. 그러다가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저런 기막힌 기술을 가졌을까 궁금했다. 따지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이 더 바쁜 아침시간인데, 어떤 마음이기에 날마다 팔색조 같은 머리 모양을 만들어 주실까? 


선주 어머니 앞으로 편지를 썼다. 편지지 한 장에는 선주 머리 모양에 대한 감회를 쓰고, 다른 한 장은 머리 모양 만들기에 관한 몇 가지 궁금한 점을 작성했다. 다음 날 선주 편으로 회신이 왔다. 내용은 이렇다.


- 선주 머리 모양이 다양하던데 머리마다 이름이 따로 있습니까?

선녀머리, 인디언 머리, 세일러문 머리, 때려 머리, 디스코 머리, 주모 머리… 모두 이름이 있습니다.


- 머리 만드는 데 시간과 재료비는 얼마나 드는지요?

색 고무줄 500원짜리 몇 개면 서너 달 동안 예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시간은 대략 5분에서 10분 정도 걸리죠. 그날 딸과 내 기분에 따라서 함께 머리 모양을 만들어요.


- 혹시 전에 미용실을 하셨거나 미용기술을 배운 적이 있습니까? 

미용을 배운 적은 없고 딸아이를 조금 예쁘게 키우고 싶은 욕심은 있었습니다. 선주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요구사항이 많았습니다. 달의 요정 '세일러문'처럼 해달라고 해서 흉내를 내보았는데 그걸 유치원 선생님이 예쁘다고 칭찬하면서부터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 아무나 만들 수 없을 것 같은데, 초보자를 위해 기술이나 재료 같은 것을 소개해 주십시오.

작은 분무기, 색 고무줄, 쪽빗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우리는 남들보다 고무줄을 조금 많이 사용할 뿐 특별한 기술은 없고요. 자주 하다 보니 요령이 저절로 생기더군요.


-  바쁜 아침에 날마다 머리 만들어 주기가 만만하지 않을 텐데요.

솔직히 바쁜 아침 시간에 머리를 묶어 달라고 하면 짜증이 날 때도 있습니다. 더구나 애써 만들어 주었는데 자기 마음에 안 든다며 징징거릴 때는 정말 빗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싶지요. '다시 또 해주나 봐라' 하고 속으로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거울을 보며 '오늘은 얼마나 예쁘게 만들어 주나?'하고 바라보는 딸아이를 보면 저절로 흐뭇해져서 신이 납니다. 딸이 만족해서 환하게 웃는 모습, 그것 하나 보는 재미로 아침마다 빗질을 한답니다.


- 엄마가 머리를 만들어 주면 어떤 점이 좋던가요?

어릴 적에 아침밥을 짓는 엄마 옆에 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을 아궁이에 넣으시며 내 머리를 예쁘게 만들어 주셨어요. 긴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땋아 검정 고무줄을(그 시절에는 예쁜 색 고무줄이 없어 내복 속에 들어있는 부드러운 고무줄을 빼서 사용했어요) 묶은 후 알록달록한 천을 잘라 리본을 달아주셨어요.

그때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쁜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전날 있었던 일을 주고받았어요. 그때 차분하게 들려주시던 어머니 목소리가 어찌나 좋았던지….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선주와도 그렇게 합니다. 몇 분 안 되는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세상에서 우리 딸이 제일 예쁘다"라고 한 마디 해주면, 선주도 "엄마가 제일 좋다"라고 대답합니다. 내가 어릴 적 느낀 그 마음을 선주도 느끼길 바랄 뿐이죠.


이 글을 쓴 지 거의 20년이 지났다.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열두 살 선주도 이제 서른 살 남짓 되어, 어쩌면 착한 사람과 인연을 맺어 보금자리를 꾸몄을 수도 있겠다. 또 세월이 가다 보면, 엄마 선주도 뒤에서 보듬어 주듯 아이를 앞에 앉히고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주겠지. 그 시절에도 엄마와 딸이 빗는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세상은 따스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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