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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Dec 30. 2021

1977.
겨울 자취방  그리고 소고기 라면

지금 음식을 안 먹어야 되는데, 먹고 싶은 사람을 위한 이야기 

공업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겨울 방학이었지만 우리는 등교했다. 얼른 국가기술자격증을 따야 3학년 때, 공장 실습을 빨리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둡고 시끄러운 실습장에서, 오전 내내 차가운 기계와 씨름하다 보면 금방 점심시간이 되었다. 


난로 주위로 모인 친구들은 차가운 도시락 뚜껑을 열고, 뜨거운 주전자 물을 부어 말아먹었다. 자취생인 나는 학교 가까이 있는 자취방으로 달려가 후다닥 점심을 챙겨 먹고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학교 담벼락 양지바른 곳에 등을 기대고 서서 키득키득거렸다.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친구 네 명이 자취방에 가는 내 뒤를 따라붙었다. 친구들은 길가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라면을 사서 나왔다.   

“입이 네 갠데 어째 라면이 세 개냐?”

내가 물었다. 그중 한 명이 제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아, 내가 감기 때문에 입맛이 없어서... 국물만 먹을게. 소고기 국물이 감기에 좋다더라.”


소고기 라면이니까 빠른 회복을 위해서 빌붙겠다는 것이다. 대신 국물만 취하고 면은 절대 손을 안 대겠다고 약속했다. 아프다는데 어쩔 수 있나. 우리는 아픈 친구를 위해 라면 국물 한 그릇 정도는 양보할 수 있었다. 


석유곤로에 심지를 올려 불을 붙이고 큰 냄비에 물 두 바가지를 부었다. 나는 능숙하게 자취생 표 소고리 라면을 조리했다. 물이 끓기 시작했다. 라면 세 개를 면 길이 약 5센티 미터 이하가 되도록 뽀개 넣었다. 젓가락으로 집어 올릴 수 있는 길이로만! 그렇지 않으면 단 한 젓가락에 라면 반 개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맛보다는 양. 부족한 라면은 양파로 채웠다. 시골에서 가져온 양파 두 개를 까서 팍팍 잘라 끓는 물에 넣었다. 그리고 라면과 스프를 넣고 기다리기를 3분? 아니 5분! 면이 어느 정도 통통해지도록!


라면과 양파가 잘 익었다. 방문을 내다보고 있는 친구들 혓바닥이 목탁을 쳤다. 나는 마지막으로  간장 두 숟갈로 간을 맞춘다. 이상 끝! 하지만 마지막 과정은 언제나 아쉽다.  '달걀 한 개만 곁들이면 완벽할텐데....' 


드디어 라면 냄비와 식은 밥그릇이 함께 밥상에 올렸다. 거룩한 라면 향기와 기름기 둥둥 뜬 아름다운 국물 색깔은 보기만 해도 행복했다. 우리는 젓가락을 드는 순간부터 무언의 약속을 한다. 젓가락 속도를 같이 하기. 라면 가닥을 최대한 동일한 양으로 집어 올리기. 친구 넷은 그렇게 서로 감시의 눈을 번뜩이며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라면이 줄어들수록 젓가락 속도는 빨라졌다. 코감기가 있어 입맛이 없다는 녀석도 어느새 열심히 면을 건져 올리고 있었다. 

“아플수록 잘 묵어라 카더라.”


우리는 눈을 흘겼지만, 각자 제 몫을 챙기기에 바빠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밉상에 또 밉상이라더니, 감기 때문에 코를 훌쩍이며 먹는 소리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왠지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맛있게 자시는데 녀석의 인중에서 맑은 방울 하나가 "똑!" 하고 냄비에 떨어졌다. 우리 모두는 두 눈 벌겋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범인이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허망한 광경에 경악한 우리는, 할 수 있는 욕설을 모두 끌어 부었다. 

”에라이 씨#@$%$^&““     


모두 젓가락을 던져 버리고 밥상에서 물러났다.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라면 냄비에서 마지막 더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코찔찔이 친구가 미안한 듯 우리를 쳐다보더니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듯 라면 냄비 속을 휘휘 저어대더니 먹기 시작했다. 이건 뭔 짓인가? 속죄인가? 집착인가?  어이가 없어 말을 잃은 우리들한테 그 친구가 말했다.

“괜찮다. 묵자. 계란 맛이다.”      


그렇게 특별한 점심을 마친 날에는 추워도 견딜만했다. 자취방을 나온 우리는 호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은 채 , 서로 어깨와 어깨를 툭툭 건드려 장난 치면서, 찬 바람 부는 좁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사진 출처: 영화 '친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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