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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형식 Jan 14. 2022

계사년 대한민력

장날 노인장이 계시던 자리 

그해 겨울, 어머니와 설을 준비하는 오일 장을 보러 갔다. 해가 떴는데도 엄청 추운 날씨였다. 우리는 방앗간에 들러 떡국 할 쌀 석 되를 맡기고 찹쌀을 빻았다. 어머니는 다른 장거리를 보러 시장 속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찹쌀가루 봉지를 들고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시간이 넉넉하여 양반 마실 가듯 장마당을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길 한쪽에 서적 좌판을 벌여 놓고 앉아 있는 노인의 특이한 품새가 눈에 띄었다. 노인은 한복 바지저고리 차림에 두툼한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에는 망건을 쓰고 발목에는 옛사람들이 하던 각반을 차고 있었다. 과거에 있던 선비가 현실로 툭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가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쉴 겸, 길가에 찹쌀가루 봉지를 내려놓고 노인을 지켜보았다. 책을 진열해 놓고 앉아 있는 품새가 어찌 시들해 보였다. 장사라면 응당 사람들이 지나가는 앞쪽을 보고 손님을 기다리고 눈을 마주쳐야 할 터인데, 노인장은 토라진 양반 어른처럼 좌판을 등지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꼭 남의 집 가게에 와서 주인 대신 잠시 자리를 지켜 주는 사람 같았다. 노인 옆에는 진열하다 말고 그냥 둔 책 박스가 입을 떡 벌리고, 안에 있는 책들은 주인장이 얼른 꺼내 진열해 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장은 무심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알지 못한 깊은 뜻이 있다는 걸, 지나가는 바람이 일깨워주었다. 갑자기 시장통으로 얼음장 같은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거친 겨울바람은 시장 바닥에 있던 종이와 가벼운 상자를 휙 날려 보내고, 허술한 천막을 치마처럼 걷어 올렸다. 장꾼들은 허겁지겁 바람에 날리는 것들을 따라다녔다. 장 보러 온 사람들도 갑자기 들이닥친 돌풍에 걸음을 멈추고 잔뜩 움츠렸다. 


단 한 사람, 노인은 의연했다. 그는 이미 예견한 듯, 불한당 같은 칼바람이 달려들자 어느새 커다란 우산을 펼쳐 당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동그란 엉덩이 의자를 약간 돌려서 앉아있는 방향을 바꾸었다. 그랬더니 우산은 방패처럼, 등 뒤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아주고, 정면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우산 안쪽으로 모여들었다. 잔뜩 움츠린 나는 지극히 평화롭고 안정된 노인의 모습에, 말로 하지 못할 어떤 경외심까지 느꼈다.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찬바람이 지나가고 움츠렸던 사람들이 다시 걷고 흥정을 시작할 때였다. 갑자기 ‘쾅!’ 하는 굉음이 들렸다. 소리의 출처는 노인장 바로 옆이었다. 생선 좌판을 벌인 젊은 아낙네가, 꽁꽁 언 동태 상자를 해체하기 위해, 상자를 번쩍 들어 올려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지나가는 사람 모두 흠칫 놀라 돌아볼 정도였다. 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편안한 자세로 마냥 아침 햇살만 즐기고 있었다. 


옛날 옛적 선비 한 분이 홀연 장마당에 와 계신 듯 듯했다. 가난한 식솔들을 위해 공부하던 서적을 팔러 나왔지만, 차마 호객을 하지 못하고 먼산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접장 어르신. 당신 바로 옆에서 꽝꽝 언 동태 상자가 내동댕이 쳐지며 폭탄 같은 소리를 내도, 수양한 선비의 품위를 잃지 않는 고고함. 나는 불현듯 노인이 파는 책을 사고 싶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좌판에는 꿈 해몽, 약초한방민간요법, 천자문, 화초재배, 명심보감 등 예스러운 책들이 바닥에 삐뚤빼뚤 제멋대로 누워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격 면에서나 부피 면에서나 제일 만만해 보이는 얇은 책 한 권을 골랐다. 내가 계산을 치르자 노인은 또 다른 책을 권했다. 

“요놈도 한 권 사. 총천연색이여. 싸게 해 줄 텡게.” 

하지만 대부분 책들은 오랫동안 팔리지 않아 헌책 같은 새 책이었다. 나는 정중하게 사양하고 물러났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차 안에서 책을 펼쳐보았다. 더듬더듬 표지를 읽어보니 ‘계사년 대한 민력’이라고 쓰여 있었다. 24절기와 농사, 예법과 명절 등 깨알 같은 가정 상식이 잔뜩 들어 있었다. 모르긴 해도 예전에는 새 해를 준비하는 요긴한 생활 서적으로 대접받았을 성싶었다. 한문에 약한 나에게는 ‘개발에 닭알’처럼 소용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화끈 달아올랐던 충동구매를 후회하지 않았다. 


그 후 장날에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 노인을 두 번 더 보았다. 한 번은 여전히 무심한 듯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고, 마지막에는 아직 장이 한창 서고 있는데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계셨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노인장은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는 화분 장수가 좌판을 펴고 있었다. 까닭 없이 지나간 시절과 지나간 사람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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