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에 손 흔드는 엄마의 손
아주 오래전, 우리 엄마가 살아 계실 때입니다. 그 집은 내 엄마와 아픈 동생과 강아지 두 마리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우리 집은 아니었습니다. 여느 시골집처럼, 먼 옛날 새색시가 시집와서 오래오래 살다가 자식들을 키워 도시로 보내고, 노인 부부가 비둘기처럼 살다가 할아버지가 먼저 가시고 할머니 혼자 살던 집입니다. 그리고 어느 해 그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몇 년을 비어 있는 집에 우리 엄마가 세를 든 집입니다.
낮은 지붕 아래에 작은 방 두 개와 부엌방 하나가 일렬횡대로 붙어 있었습니다. 그중 가운데 방 하나를 주방으로 만들었지만 여전히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아들의 간청에도 차마 정든 집을 떠나지 않은 할머니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장독대에 있는 옹기들과 안방에 있는 자개농에서 할머니 체취가 짙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몇 날 며칠 동안 묵은 집을 청소하고 정리를 하였습니다. 집안 구석구석에 식솔들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살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댓돌과 녹슨 농기구와 먼지를 둘러 쓰고 있는 세간살이와 탱자나무 열매 하나까지 원래 살던 주인 부부의 젊은 시절 땀과 웃음이 배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넓은 마당을 뒤덮은 잡초를 베어 내고 나니 숨어있던 텃밭과 잔디밭이 온전하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불밤송이 총각 머리카락처럼 부스스하던 집이 원래 해맑은 얼굴을 찾았습니다. 새들이 날아와 쉬다가 간 자국이 가득한 마루를 닦아내고 앉아 하늘을 바라 보았습니다. 앞이 시원하게 툭 트여 고개를 들지 않아도 파란 하늘이 한눈에 다 들어왔습니다.
엄마는 울안에 있는 텃밭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혼자 가꾸기 벅찰 만큼 넓은 텃밭인데도, 그해 내내 감자와 고추를 키우고 가을에는 욕심껏 배추 모종을 심으셨습니다. 싹이 돋고 무럭무럭 자라 열매 맺는 모습이 어린 자식 키우는 것처럼 사랑스럽다면서요. 살아 생전 혼자 집을 지키며 살던 그 할머니도 그랬을 테지요. 하지만 할머니가 도시에 사는 자식을 따라 가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밭일을 끝낸 저녁이었습니다. 엄마가 차려 온 저녁 밥상에 모두 둘러앉았습니다. 엄마는 당신이 직접 가꾼 풋이파리를 소쿠리째 내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전에 못 보던 푸성귀가 눈에 띄었습니다. 내가 뭐냐고 물어보자 엄마는 '민들레 잎사귀'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당신 말대로 상추와 곁들여 쌈 싸서 먹어보니 봄맛이 한결 더했습니다. 엄마는 담장 너머에 사는 옆집 노인에게 들은 말을 우리한테 전해 주었습니다.
"이 집에 살던 할머니가 아들이 간이 안 좋아서 심은 민들레란다."
어느 해, 도시에서 살다가 병을 얻은 아들이 이 집에 와서 함께 살았답니다. 할머니는 간이 안좋은 아들을 위해 온갖 것을 구해다 먹였고 다행히 아들은 몸을 회복하여 일을 하던 직장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민들레 잎이 먹거리였다는 것조차 처음 알게 된 내 깜냥에, 간에 좋은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니 민들레가 지천이었습니다.
이듬해 그 집이 팔리는 바람에 우리 엄마와 동생은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후에도 한동안 마당 넓은 그 집은 비어있었습니다. 가끔 엄마 집에 가는 길에 잠시 차를 세우고 담장 너머에서 그 집을 바라보았습니다. 담장 밑에, 장독간에, 허물어진 축사 옆에 민들레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자식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엄마 마음이 꽃으로 피어 손 흔들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모든 엄마가, 세상에 모든 자식들에게 흔들어주는 손같았습니다.
* 보글보글 이전 글, 로운 작가님의 '스물. 그해 봄.(No.1)
4월 1주(4.4~4.9)
봄 시리즈 네 번째 주제 "봄꽃"
5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다양한 글을 각각의 색으로 소개합니다. 주제는 그림책을 매개로 하여 선정됩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매일 한 편씩 소개됩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작가님들은 매주 일요일 주제가 나간 이후, 댓글로 [제안] 해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