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과 개인의 성장
좋은 리더란 어떤 걸까.
50. 일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대표님이 조용히 찾아와 나에게 물었다. "실무자 대상으로 마케팅 강의 한번 해보지 않을래?" 뭔가 인정받은 것 같은 느낌과 막연한 두려움이 뒤섞인 채로 나도 모르게 대답해 버렸다. "음.. 네 해보겠습니다"
팀 매니징과 실무를 병행하고 있어서 여유가 없었는데 그땐 못하겠다는 말이 정말 하기 싫었다. 덕분에 그 이후로 약 8년 가까이 현업에서 마케팅 강의를 꾸준히 하고 있다.
51.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강의 장표를 만들고, 잠들기 전에는 연습을 했다. 꽤 야심한 시간임에도 신림동 원룸 옥상 밤공기는 찼지만 사방군데 반짝거리는 불빛들을 청중 삼아 내가 오늘 만든 강의 장표를 떠올리며 매일 잠들기 전 1시간씩 연습했다. 그렇게 매일같이 3~4주쯤 했을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회사 내 회의실에 있는 화이트보드를 멍 때리며 보고 있는데 강의 장표 없이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을 판서하며 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감정은 신기할 만큼 새로웠다.
52. 무사히 첫 강의를 마치고 가려는데 덕분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연신 감사하다며 계속 인사해 주시는 분이 있었다. 뭉클한 기분이 들면서 더 잘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는데 이 기분은 매 강의를 할 때마다 받는 보너스 같았다. 지금도 현업에서 강의활동을 하고 있는 것 역시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기여를 한다고 느낄 때 삶의 만족도가 올라가기 때문.
53. 강의를 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고객사 수주가 늘면서 추가 채용까지 하게 되었고, 관리 포인트 역시 늘어났다. 사수 없이 일해오다 팀장이 되어버린 나는.. 어느 순간 어떻게 팀을 리딩해야 허둥대지 않고 노련하게 이끌 수 있을까를 매일 고민했다.
54. 안타깝게도 난 일관성 없이 그때마다 제일 멋져 보이는 것들을 주머니에 꺼내어 행동했다.
'지금은 예전 상사분처럼 무섭고 강하게 리딩하는 게 좋겠지?'
'이럴 땐 옆 팀 경험 많은 팀장님처럼 모른 척 내버려 두는 게 낫겠어'
'책에서 보니까 이 상황에선 이렇게 먼저 임팩트를 보여줘야 잘 따르는 것 같던데..'
55. 이제와 아무리 그 시절 예쁘게 포장해보려 해도 이불킥감이다. 마치 온갖 멋지고 좋은 것들로 뒤덮인 자기 계발서만을 읽다가 만신창이 퓨전 짬뽕이 된 것처럼. 실상 모든 게 불안에서 기인한 행동과 생각들이었다. 가진 역량에 비해 잘하고 싶은 욕심이 컸으니 그럴 만도 하지..
56. 혹시 지금 그때의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누군가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틀려도 괜찮고, 실수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팀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건 리더의 일관성 없는 모습과 무책임함이다. 돌이켜보면 애초에 좋은 리더십과 나쁜 리더십은 없었다. 그냥 나와 맞는 리더십과 맞지 않는 리더십이 있을 뿐이라고 정리됐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 회사가 정한 '일하는 방식(조직 문화)'에 맞게 일을 하고 있느냐라는 사실이다. 누구든 여기에 맞지 않으면 떠나는 게 맞다. 나답게 제대로 기여할 수 있는 곳으로.
57.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일 잘하는 사람이 꼭 훌륭한 리더가 되는 건 아니었다. 혼자 1인분 이상을 멋지게 해내는 것과 팀 목표를 달성하는 건 레벨이 다른 게임이다. 경험 상 리더도 팀원들에 의해, 팀원들과 힘께 성장하더라. 내가 리더로서 제법 괜찮은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면 그간 함께한 팀원들이 훌륭했을 가능성이 높다.
58. 중간 관리자 위치에서 업무를 하다 보니 매번 팀원을 설득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당시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가끔 나조차도 납득이 잘 되지 않는걸 팀원들에게 설명하고 설득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게 몹시 괴로웠다. 끝내 내 상위 리더를 설득하지 못한 자책과 이걸 어떻게 동기부여해야 동료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날 힘들게 했다.
59. 그래도 우리는 늘 선택을 해야만 하고, 조직에서 의사결정이 끝나면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따라야 한다. 그리고 정답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건 딴딴하고 섹시한 전략보다 강한 실행력과 회복탄력성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60. 미생이란 드라마에서 그랬던가.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또 다른 문이 있고 우리는 새로운 문을 향해 계속 열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자동문은 대체 어디 있는 걸까. 저기만 넘으면 원하는 지점에 당도할 것 같은데 자꾸만 새로운 문제들이 내 앞에 다가온 왔고, 그 문제를 풀지 말지는 오롯이 내가 결정해야 했다. 재밌는 건 내가 풀지 않고 피했던 문제는 언제가 다른 상황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더라.
61. 다시 마주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문제를 내가 풀 필요는 없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전문가를 찾거나, 나보다 그걸 더 잘하는 동료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된다. 중간관리자가 되고 나서 진짜 중요했던 건 내가 뭘 잘하고 못하는지 아는 것과, 그걸 투명하게 오픈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내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진 사람을 알아보는 선구안과 흡인력이었다.
62. 연차가 쌓이면서 조금씩 편해졌고, 그렇게 컴포트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하기만 이게 또 다른 불안으로 다가왔다. 익숙함을 벗어나면 낯설고 불안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편해지니까 불안해졌다. 사람에 따라 성향에 따라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익숙함을 벗어난다는 의미는 새롭고 설레고 기대되는 쪽에 더 가까웠고,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결국 선택은 내 몫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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