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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무시해?

그녀들은 무엇에 걸렸는가.

by 쓱쓱

오전 9시 아파트 헬스장에는 9시 타임 크루가 있다.


대부분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의 어머님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크루는 아파트 헬스장이 생겼을 때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한 유구한(?) 역사를 지닌 그룹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얼핏 들어보면 아파트 안 큰 평수의 자가를 보유하고 있으며 노후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 있고 젊은 시절에는 나름 잘 나갔던 이력들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화려한 입담과 큰 목청으로 오전 9시 웨이트 실을 장악하는 그녀들은 자신들만의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을 희미하게 지우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그녀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보였다. 만약 의식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 큰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을 계속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도 헬스장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웨이트 실로 향했지만, 안을 힐끗 보니, 이미 소란스러움이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급히 지나쳐 러닝 머신을 선택했다. 한 차례 사람들이 빠지면 들어갈 심산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러닝 머신 위에서 힘겹게 걷고 있을 때, 갑지가 웨이트 실에서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극도로 흥분한 목소리들이 긴박하게 엉켜 헬스장을 크게 울렸다.

악을 쓰며 방방 뛰는 한 어르신이 보였고, 그녀를 말리는 다른 아주머니의 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함께 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싸우는 사람보다 말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크고 괴기해서 그녀의 소리가 몸에 닿을 때마다 온몸에 쭈볏쭈볏 소름이 돋았다.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웅성거리 시작했고 사태를 확인하려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온 정신과 주의를 그쪽으로 기울이면서도 차마 가까이 가볼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러닝 머신 위를 걸었다.

솔직히 싸움의 원인이 너무나 궁금했지만 싸움 구경이나 하는 한심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쪼잔한 자격지심 때문에 애꿎은 다리만 생고생을 시키고 있었다.


대략 정황을 맞춰보니,

9시 크루들이 모여 있는 상황에서 헬스장 직원이 개인 피티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그녀들이 너무 소란스럽다고 판단한 직원이 조금 조용히 해달라는 요청을 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들은 설명으로는 자주 다른 회원들이 직원에게 9시 크루들에 대한 컴플레인을 했었다고 한다.


여하튼,

그래서 다른 회원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조금 조용히 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이에 크루의 수장이 이 요청을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드려 바로 맞대응을 한 것이었다.


"그쪽 목소리가 더 크고 시끄럽다고!"


그렇게 해서

누구 목소리가 더 큰지, 누가 더 시끄럽고 소란스러운지에 대한 과격한 논쟁이 붙었고 결국 그러한 논쟁은 감정싸움으로 진화되었으며 이후 진흙탕 싸움으로 번져 마지막엔 지랄하네에 이르게 되었다.


실제 이 단어는 실로 강력한 정서적 역동을 일으키기에 너무나 충분했기에, 크루의 수장은 급노에 휩싸였고 악다구니가 30분가량 오고 가며 지속되었다.


이윽고 더 이상 악을 쓸 기운이 남아있지 않게 되기까지의 시간이 흘렀다.

9시 크루들이 한데 모여 관리사무실에 강력한 고발 및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사라진 후에야 상황이 비로소 정리되는 듯 보였다.


나름의 루틴에 집착하는 나는 웨이트를 포기할 수 없었기에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웨이트 실로 들어갔다. 분노와 격노의 기운이 조금은 남아 있는 듯 보였지만, 모른 척 아령을 들었다.


웨이트 실에 남아 있던 어르신들이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와 해석을 시작했다.

크루의 수장도 평소 시끄러운 편이긴 하지만 직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는 의견과 그래도 직원이 고객한테 그러면 되겠냐는 의견, 장유유서가 엄연한데 나이도 어린 자가 싸가지 없이 그렇게 어른한테 대들어서야 되겠냐는 의견 등이 분분했고 하나의 흐름은 결국 직원이 너무했다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모두 직원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헬스장의 회원들이었다.


조금 지나 해당 직원이 웨이트 실로 들어와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하다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직원으로서 헬스장 운영과 관리가 필요한 부분에 대한 자신의 책임과 권리에 대해 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개인 피티를 진행 중이었는데, 싸움으로 인해 진행하지 못하게 된 부분은 명백히 수업 방해라고 강조했다.

한 어르신이 '선생님도 목소리가 그렇게 작은 편이 아니라'라고 은근히 기름을 붓자, 직원이 파르르 떨며 응수하기 시작했다.

회원님이 평소에 저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건은 객관적으로 판단하셔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졸지에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어르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직원을 쳐다보았다.


나는 버터플라이 기구에 앉아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건을 재구성해 보았다.

새해 벽두부터 이토록 강렬하게 분노에 휩싸일 정도로 무엇이 그녀들을 격분하게 했을까...


그것은 결국 존재에 대한 긍정적 존중의 결여였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데에서 오는 분노와 좌절이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수용해 주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결핍과 성냄이었다.

이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발현되는 방식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감히 나를 무시해?"


여러 사람들이 함께 운동하는 곳이니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는 말이 어떻게 나를 무시한다고 해석이 되었을까.

선생님도 목소리가 만만치 않게 크지 않느냐라는 말이 어떻게 해서 나를 무시한다고 해석이 되었을까.


결국 모두 누군가의 긍정적인 존중과 따뜻한 수용과 한결같은 사랑이 그토록 필요하다는 것을 그렇게 악을 쓰며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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